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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전함(1)
본문:고전 1:22~
설교자: 이현래 목사님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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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내용
그리스도를 전함(1)
(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능력)을 구하며 헬라인은 지혜(초월)를 찾는다.“고 했다.
덧 부치면 중국인은 인륜도덕(천리)을 학습 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가?
인류를 대표하는 이들이 찾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것들인데 그와의 연합 없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얻지 못할 것을 구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여 원하신 연합을 버리고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려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위치를 바로 되게 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그 안에서)
인간은 정해진 위치를 이탈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다. 그래서 서로 간에는 위치가 있다. 위치가 바르면 의고, 빗나가면 죄가 된다.
사람은 피조물 중에 특별한 위치에 있다. 피조물은 순서대로 지어졌는데 무생물-생물(동식물)-인간의 순서(단계)대로다. 사람은 최종단계에서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모든 창조는 사람 창조의 단계 안에 위치하며, 사람은 창조의 목표로서 만유를 포함한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사람에게 만유를 포함하여 창조자를 표현하고 대신하도록 하려 함이다.(창1:26,7)
사람은 피조물 중에 으뜸이며,(골1:15)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중보자로서의 사명은 지극히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다.(히2:7)
그러므로 창조자 하나님의 목적과 필요에 맞아야 하나님이 이름 하신 “사람”이라 할 수 있다.(창1:26)
그런데 지금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인간은 만물보다 더 못한 위치에 있으며,(롬1:18~) 그들에 의해 경영되는 세상은 혼란만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현들은 윤리와 지혜를 펼쳐서 교화하려 하고, 영웅들은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러나 창조자 하나님은 단순하게 한 가지 금령을 주셨다. 생명을 지식(선악과)으로 대체하지만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금령을 왜 위반했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전 인류에게 하나같은가?
이에 대하여 어떤 신학자는 교만해서라고 한다. 주신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없지 않으나 부족하다.
신학자들, 특히 어거스틴이 말하는 원죄, 즉 불순종과, 교만과, 욕심은 자신이 방황했을 때의 경험(증상) 일뿐이지 이 중에 그 어느 것도 그 동기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왜 절대적인 명령에 불순종했으며, 지금도 모든 인간이 이 금령에 불순종한 아담 안에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으면 기독교는 인류문제에 대한 어떤 대답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가 있다! 그러지 않을 수 없는 확실한 이유가 있다. 인간이 불의에 빠지는 데는 명백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할 존귀한 위치를 받았다. 더 이상이 없는 영광을 약속 받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결국에 죽는다. 운명적으로 주어진 제한이다.
예수 죽으심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는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 “이는 내 아들이다” 칭함을 받았고,
그리고 하나님 같은 많은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제자들로부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극도의 존경을 받았으며,
목격자들로부터 “누가 이런 일을 행하겠느냐”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경외 함으로 증거 되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거나, 아니면 제자들처럼 제발 내려와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했지마는 죽음만은 어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모든 인류가 각자의 운명을 놓고 마주친 사건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신)이면 내려와 봐라”......... 사람도 신(천사)처럼 죽지 않을 수도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경우, 또 어떤 사람이라 해도 “죽는다,” “죽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먹지 말라는 것을 왜 먹었는가? 왜 모든 인간이 다 함께 아담 안에 있다고 하는가? 유전, 전가, 모방,.....이라 하지만 아니다. 오늘도 함께 먹고 있는 현실이고 사실이다.
불가에서도 이 죽음, 이 제한을 벗어나려고 해탈을 소망하는 것이 아닐까? 해탈했다는 불자들은 죽음이나 삶이나 일반이라고 말한다. 관념 속으로 깊이 숨는 것은 아닐까? 숨긴다고 없어지는 것일까?....
아담은 왜 그렇게도 엄중한 금령을 그리도 쉽게 위반했는가?
만유는 다 죽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죽음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 죽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이 자가 유혹했기 때문에 쉽게 먹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은 실은 천사, 자기 같이 된다는 말인 것이다. 죽지 않는 피조물이 와서 자기를 증거로 유혹하니까 바로 길이 여기 있다고 믿고 먹은 것 같다.
나도 저 자가 먹는 양식을 먹으면 저 자와 같이 되겠구나! 피조물도 죽지 않을 수 있구나! 천사는 이 것을 먹고 신과 같이 되어 죽지 않는 구나! 불사초를 발견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소가 고기를 먹는다고 호랑이가 될 수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광우병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생명마다 먹는 양식이 정해져 있다.
선악과는 천사(부리는 영)를 위한 양식이다. 사람(상속자)을 위한 양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은 오도 가도 못하도록 “죽음”에 걸려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죽음의 수치와 고난을 당하고(히2:9,15,12:2) 인생의 운명을 폭로하고 그 죽음에 매여 일생을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예수 죽으심에서 인생의 죽음을 확실하게 보았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신이 된다는 선악과-불사초(?)를 먹어도 죽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만유를 포함한 참 사람의 위치를 회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드린다.
천사의 능력을 능히 제압하는 만유의 주로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라!
석가의 해탈 앞에는 만민이 모여 구도할 것이다. (비싼 값을 지불하고라도)
하지만 자기 혼자뿐이며, 있다 해도 특별한 사람들 얼마뿐이다.
예수의 죽음 앞에서는 만민이 다 떠나갔다. 입었던 그의 옷마저도 제비 뽑아 가져갔고, 맹세했던 제자들까지도 버리고 다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으심은 만유를 포함하였음으로 죽음에 매여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구원하고, 불순종과 교만과 욕심에 묶여 있는 죄인을 해방하였다.
예수께서는 인간을 신과 같이 되게 하려고 하시지 않았다. 사단에게 유린당한 나-사람을 찾아주고, 나를 참 사람으로 하나님에게로 이끌어 들인 것이다.
누가 나의 주님이신가! 천상천하에 누가 우리 주님이신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누구인가! (히2:10) 오 !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소는 풀을 먹고 되새김질 하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산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를 먹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인생의 존귀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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