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흠없이 보존되기를 원함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5:23-24).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마지막 말씀을 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 하였다.

데살로니가 1장에서는 우상에서 돌아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을 하였는데, 2장에 와서는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 유모가 아기를 키우는 것처럼 양육하였다고 하였고, 3장에서는 마음을 거룩함 안에서 견고하게 하라 하였다. 4장에서는 너희 몸을 거룩하게 보존하라 하였고, 5장에서는 영과 혼과 몸이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는데, 이 모든 말씀은 주님이 강림하실 때 우리가 그를 맞이할 수 있는 자격으로서 갖추어야 될 문제들을 말씀한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사람의 존재가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표현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분설(二分設)을 주장하여 몸과 영혼만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영과 혼과 몸으로 확실하게 갈라져 있다. 우리가 생활하는 데는 마음과 몸으로 갈라지지만 우리의 존재는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온전하고 완전하게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하였고, 하나님이 미쁘시기 때문에 이것을 이루실 것이라고 소망하였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보전되기를 원하는 것인가? 그것은 주의 강림을 위한 것이다. 강림(降臨)이라는 말은 ‘파루시아’라는 말인데, 이 말은 ‘임재(臨在)한다.’, 혹은 ‘나타난다.’ 는 뜻이다. 공중에서 어떤 물건이 내려온다는 의미가 아니고 함께 한다는 뜻이다. 현실적으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나라는 하나님의 왕국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왕국을 위해서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전돼야 한다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집’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한면으로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체라는 말은 머리의 어떠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머리의 형상인 것이다. 그래서 머리 안에서는 ‘지체’라고 하고 맏아들 안에서는 ‘형제’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라면 우리는 지체이고, 그분이 맏아들이라면 우리는 형제인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유기체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백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나라’라는 개념과 관계된다. 그가 왕일 경우에 우리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나라는 결국 백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머리되심 안에서 지체가 되든지, 맏아들되심 안에서 형제가 되든지, 그의 왕되심 안에서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는 생명에 관계되는 말이고, 하나는 순서에 관계되는 말이며, 하나는 통치에 관계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서 그의 통치를 완성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강림하시면 그의 통치가 완성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공중에서 내려와서 마치 클린턴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처럼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세울 나라는 대통령이 통치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이 통치하는 나라이다. 태양이 있어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빛이 어둠을 빛이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그러한 통치를 의미한다.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가 아닌 것이다. 태양은 빛으로 어둠을 통치하고 있고, 열로 추위를 통치하고 있다. 만일 이 땅 위에 태양의 통치가 없어진다면 암흑이 되고, 꽁꽁 얼어서 동토(凍土)가 될 수밖에 없다. 태양의 통치는 자기의 존재로 통치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존재가 그러하기 때문에, 뜨겁고 빛이 나기 때문에 그존재로 통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도 그러하다. 세상의 통치는 기술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존재의 통치이다.

존재의 통치는 그 진실의 통치라고 할 수 있다. 진실로 거짓을 다스리고, 영광으로 부끄러움을 다스리고, 권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교회 생활에서 누리고 맛보고 있는 통치이기도 하다. 우리의 거짓됨이 물러간 것은 그의 진실 때문이고, 우리의 수치가 물러간 것은 그의 영광 때문이며, 우리의 세상이 물러간 것은 그의 권능과 권세 때문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이것을 맛보고 누리고 있다.

그런데 양과 질에 있어서 이것이 점점 더 확대되어서 온 땅 위에 태양이 비취듯 비추게 될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날을 위해서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흠없이 보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흠이 없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선 도덕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기 쉽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종교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흠이 없다.’는 것은 목적에 따른 것이다.

망치는 못질하는 데 흠이 없어야 한다. 어떤 망치는 겉은 말짱하게 생겼는데 못질을 하면 쇠가 우그러들어서 망치질이 안되는 것이 있다. 그러면 못질을 제대로 못하게 되니까 망치로서 흠이 있는 것이다. 모양이 이렇게 생겼든지 저렇게 생겼든지 못질을 해도 자기 자신이 으그러지지 않아야 다음에도 못질을 계속할 수 있다. 모양이 좋다 해서 반드시 좋은 망치인 것은 아니다. 요즘 길거리에서 파는 망치를 보면 모양이 좋은 망치가 많다. 그러나 몇 번 쓰면 으그러져서 못쓰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있는 존재이다. 그런즉 하나님을 표현 하는데 흠이 없어야 한다.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흠이 없게 된다는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지어진 존재들이니까 하나님을 표현하는 데 흠이 없어야 된다는 것이다. .

영과 혼과 몸이 보전되기를 원한다는 말은 전인적으로 전 인격체가 온전해야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생명이 어떤 통로를 통해서 흐르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는 소나무가 많이 나고 어떤 곳에는 밤나무가 많이 난다. 왜 그런가? 생명이 각각 자랄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밤나무가 살지 못할 조건에 밤나무를 심어 놓으면 살지 못하고 죽는다. 효령 농장에 한때 감나무를 심었었는데 거의 다 죽어 버리고 돌감나무 몇 그루만 남았다. 처음에 감나무를 심을 때 그 동네에 사시는 할아버지가 “여기는 감나무를 심으면 안되는데......”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감나무 묘목을 준 사람이 농과대학을 나온 유식한 사람이었는데 “이건 일본에서 수입한 종자로 우리 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잘 자란다.”는 말을 듣고, 영감님의 말을 들을 것인가, 이 농학도의 말을 들을 것인가 하며 생각하다가 결국 나는 지식을 따라서 농학도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감나무가 다 죽어 버리고 말았다. 경험이 지식보다 더 나았던 것이다. 생명은 어떤 조건이 있어야 살 수 있다. 그 기후나 토질에 맞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물은 물길이 있어야 가고, 생명은 생명의 길이 있어야 가게 된다. 피는 혈관이 있어야 흐르게 된다. 피는 혈관이 없으면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뇌출혈은 혈관이 터져서 생기는 증상이다. 피는 우리 몸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혈관이 터지면 사람이 죽게 된다. 한방에서 기(氣)는 경락(經絡)을 통해서 흐른다고 한다. 그래서 침을 맞는 것은 기가 흘러가는 것을 조절하려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왔는가?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오셨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 하셨던 그대로 오셨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은 여자의 후손을 따라 오셨다. 사탄을 이길 자는 여자의 후손으로 와야 된다.

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되는가? 오직 생명뿐이니까 지식을 이기는 것이다. 지식을 가진 사탄을 이기려면 오직 생명이라야 한다. 지식을 또 다른 지식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지식 중에 가장 높은 지식은 선악을 아는 지식이다. 그 지식보다 더 높은 지식은 없다. 이 세상의 어떤 지식도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지식보다 높은 지식이 없다. 그런즉 어떤 지식으로 그 지식을 대항해서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떤 절대적인 지식, 종교적인 지식이나 교리적인 지식을 가지면 사탄을 대항해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교리가 잘못되어서 사탄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교리도 사탄을 이길 만한 교리는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간단히 표현된 그 말 속에는 모든 지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 한 사람이 우리의 대표자라고 하면 이 땅 위에 있는 인류 중에 아담 이상의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아담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어떤 사람도 아담 이상의 범주를 벗어날 사람이 없다. 아담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라는 말 속에는 모든 지식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지식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 지식을 넘어서는 지식은 없다. 어떤 지식이라도 그 지식을 이겨낼 지식은 없다.

지식을 이기는 길은 생명밖에 없다. 생명만이 지식을 대항할 수 있다. 지식은 그 지식을 대항할 수 없다. 과학적인 지식은 반대가 되기도 하고 적대 관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가도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개구리끼리 싸우는 문제이지, 개구리와 뱀이 싸우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선악의 지식의 절대적인 적은 생명이고, 생명의 절대적인 적은 지식이다. 다른 것은 서로 대항할 것이 없다.

만일 안식일 때문에 사람이 죽게 되었다면 안식일을 파(破)하게 되는 것이다. 안식일로 인해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안식일에 대한 교리와 규례와 지식이 우세하지만, 내가 거기서 죽게 된다면 안식일을 파하고 사람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38년 된 병자를 고치실 때 사람들이 “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라고 지식을 가지고 비난하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38년 동안이나 어둠과 질병 가운데 있었는데 안식일이라 해서 병을 고치지 못하면 되겠느냐.”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장님이 눈을 떴을 때 사람들은 “왜 안식일에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느냐?”고 하였다. 이것은 지식이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이 더 중요하지 안식일(지식)이 더 중요하느냐고 하셨던 것이다. 안식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안식일은 중요하지만 안식일에 대한 지식은 생명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교리가 살리지 못하면 생명이 힘을 발휘하게 된다. 평상시에 평안하여 오징어 다리나 뜯어먹고 있을 때는 지식이 앞서지만 생사가 앞에 놓이게 되면 지식은 소용이 없다.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어떤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도 지식을 가진 교리적인 사람들은 생명보다 교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교리에 위배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처형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종교다.

가톨릭도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였고, 개신교도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고 증오하고 저주하였다. 교리 때문에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생명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교리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교리를 수호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몇 사람이 죽더라도 교리는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저 사람을 살려 두면 교리가 손상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예수님을 살려 두면 자기들의 지식의 세계가 무너지기 때문에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사람이 절대적인 상황에 이르게 되면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생명이 중요한지 모르고 지식이 더 중요하고 고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교리가 평안을 주지 못할 때 사람들은 교리를 파하고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교리를 가져도 평안이 없다면 교리를 파하고 나오게 되는 것이다.

자식을 살리려면 지식을 파해야 될 때가 있다. 지식은 옳은 것이지만, 꼭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지만 자식을 살리려니까 파해야 될 때가 생기는 것이다. 38년된 병자를 고치려니까 안식일에 대한 규례를 파괴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지식을 파할 수 있다. 생명만이 지식을 파할 수 있다. 평소에는 지식이 더 강한 것 같지만 절대적인 순간에는 생명이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늘 절대적인 순간에 봉착해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항상 지식의 고상함을 따르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지식을 즐기는 평소의 상황에서 오시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상황에서 오신다. 절대적인 생명의 노선에서 예수가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왜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하는가? 왜 천국은 가난한 자에게 침노를 당하는가? “사흘 굶어 담 넘지 않는 사람 없다.”는 말처럼 죽게 되었으니까, 가난하고 없으니까 침노를 하는 것이다. 돈 많은 사람이 취미로 도둑질을 하겠는가? 그럴 사람은 없다. 배가 고프니까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세상이 험악해져서 그런 사람도 있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배가 고파야 담을 넘는 것이지, 오락실에 가려고 담을 넘는 미친놈은 없을 것이다. 요즘은 세상이 너무 이상하게 돼 버려서 고래도 방향을 잃고 돌아다니고 거북이도 방향을 잃고 돌아다니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인간이 자기가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사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인 생명의 노선을 따라서 오시는 분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흐르기 위해서는 통로가 필요하고 길이 필요하다. 이 통로가 무엇인가? 인격이다. 그리스도가 흐르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표현되기 위해서는 교리나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인격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영과 혼과 몸이라고 한 것은 인격이 보전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격은 그리스도의 통로일 뿐 아니라 왕국의 요소가 되고, 왕국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은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과 진주와 보석은 인격이다. 교리가 아니고 인격이다. 거기는 장로교 교리도 없고 감리교 교리도 없다. 그런 것들은 새 예루살렘이 될 수 없다. 만일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면 인격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돼야 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는 새 예루살렘 성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이 이루어질 때는 그 전체가 인격체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인격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표현되는 것이다. 그 인격체가 아니면 하나님은 표현될 수 없다. 하나님 마음이 무엇으로 표현되겠는가? 어떤 인격의 마음을 통해서 표현된다. 사람의 마음이 사람의 마음 아닌 것으로 표현되겠는가? 사람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으로만 표현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마음도 인격으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온전한 인격에서 온전한 그리스도가 표현되는 것이다.

같은 씨를 받았다 해도 흙이 온전해야 열매가 온전하다. 흙이 온전치 못하면 열매가 온전치 못하다같은 씨를 뿌려도 어떤 땅에 뿌려진 씨는 열매도 좋고 충실한데 어떤 땅에 뿌려진 씨는 간신히 살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씨는 같지만 흙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동일하게 임하지만 나타나는 것이 각기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고 인격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전기는 똑같이 오지만 등(燈) 때문에 색깔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지금 여기는 형광등을 켜 놓고 있지만 백열등을 켜 놓으면 얼굴 색깔이 달라지게 된다. 사람은 똑같은데 형광등을 켜 놓고 찍은 사진과 백열등을 켜 놓고 찍은 사진이 다르다. 형광등을 켜 놓고 찍은 것은 창백하게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핏기가 없는 사람인데 형광등을 켜 놓으니까 더 창백하게 보인다. 그래서 형광등을 백열등으로 바꿔서 창백한 분위기를 따뜻하고 온화한 분위기로 바꾸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전기는 똑같다. 한국 전력에서 창백한 전기, 온화한 전기를 따로 보내는 것이 아니다. 등 때문에 창백하기도 하고 온화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격에 따라서 하나님의 표현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로 보아 바울이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흠이 있으면 표현에 손상을 준다.

다이아몬드에 흠이 있으면 값이 없다. 보석상에서는 “다이아몬드는 한번 샀다가 다시 팔면 값이 없다.”고 한다. 흠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심적인 보석상에서 들으니까 다이아몬드를 싸게 사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이아몬드는 여간해서 긁히지 않는다. 다이아몬드로 쇠도 깎는데 다이아몬드가 긁히겠는가? 다이아몬드는 긁히지 않기 때문에 값이 비싼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보석상에서는 싸게 사려고 “다이아몬드는 샀다가 팔려면 손해가 많다.”고 한다. 다이아몬드는 긁히면 빛을 제대로 반사할 수 없게 되므로 값이 없다. 다이아몬드 원석을 여러 각도로 깍아 놓아서 빛을 반사하게 만들었는데 만일 결함이 생기면 빛의 반사가 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게 비추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려면 우리의 깎아진 모든 면들이 일정하고 정확하고 온전해야 한다. 그래야만 빛이 아름답게 빛나게 된다. 만일 불균형하게 돼 있으면 불균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치 못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인격이 보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흠이 없는 인격을 보전하기를 원하신다. 교리를 보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흠이 없는 인격을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흠이 없는 교리를 보존하려고 한다. 사탄에게 속아 있기 때문이다. 흠이 없는 교리를 보존해 봤자 그리스도는 나타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찌됐든 교리가 완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어떤 교리를 믿고 있고 어떤 지식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것으로 이단, 정통을 규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생각인 것이다.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교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인격이 필요한데 인격은 제쳐놓고 교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리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필요 있지만 인격을 위해서만 필요해야 하지 그것이 인격보다 더 필요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보전하기를 원하시는가?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였다.

이삭을 낳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무엇이 필요했는가? 지식이 필요했는가, 인격이 필요했는가?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낳을 수 있는 인격이 필요했던 것이다. 죽고 다시 난 사람, 부활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그런 인격이 필요한 것이다. 아브라함 역시 죽고 다시 난 사람이라야 죽고 다시 난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렇지 않으면 거기서 이삭은 나올 수 없다. 이삭을 낳기 전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인생이 끝나고 다시 난 사람이었다. 100살이 되었을 때 자기로서는 모든 것이 끝난 사람이었다. 그때 이삭을 낳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삭이 나온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나왔고 유대 나라에서는 예수가 나왔다.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우연히 나오게 된 것이 아니다. 그런 흐름이 흘러 내려와서 결국은 예수라는 사람이 나오게 되었고, 석가모니라는 사람이 나오게 된 것이다. 왜 우리 나라에서는 예수가 나오지 않고 유대 나라에서 나왔는가? 물줄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삭을 낳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전인적인 인격이 필요하였다. 그 인격을 위해서 100살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어떤 교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인격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모세라는 사람이 필요했다. 모세의 인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80년을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지식으로 될 수 있다면 40세 때에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애굽의 모든 학술을 통달했을지라도 그것으로는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광야에서 40년의 기간을 더 지내면서 새로운 인격이 돼야만 했던 것이다. 다른 인격이 돼야만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다윗이라는 인격이 필요하였다. 사울이라는 사람을 통해서는 이스라엘이 실패하고 다윗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세워진 것을 볼 수 있다. 왜 그랬는가? 사울이 지식이 없어서 그랬는가? 그렇지 않다. 사울과 다윗의 인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불순종하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자기의 힘이 있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자기의 힘이 없는 사람이었다. 인격의 차이 때문에 한 사람은 왕이 되었어도 실패하였고 한 사람은 왕이 되어 성공하게 되었다.

예언자를 선택하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선지자들이 필요했는데, 그것도 요즘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무나 불러서 성령을 불어넣으신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인격과 그 예언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호세아서와 호세아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호세아가 아니고서는 호세아서가 나올 수 없다. 호세아는 분명히 자기의 아내를 잃어버렸던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들어서 간음한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그려 놓으셨다. 예언을 위해서는 선지자의 인격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격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사람을 찾으시고 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셨는가? 그가 당신 자신을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독생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독생자는 자기의 표현을 위해서 교회를 원했는가? 교회가 유일하게 자기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베드로, 바울, 요한을 불렀던 것인가?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인격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을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연단하고 고치셨으며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끝나게 하셨고 거듭나게 하셔서 그 사람들을 자기의 증인으로 세우셨다. 그 사람들의 지식이나 교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고 그들의 인격이 필요했던 것이다. 새로 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새로 난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 난 사람이 필요하다. 부활 생명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부활 생명이 필요하다. 죽었다가 산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죽었다가 산 사람이 필요하다. 죽고 다시 산 사람이 아니면 죽었다가 산 사람을 표현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대신해 줄 사람을 찾는다면 어떤 사람을 찾겠는가? 자기와 같은 사람, 자기와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을 찾을 것이다. 지식이 많거나 교리가 옳다 해서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히 자기의 마음과 같은 사람에게 맡길 것이다. 교리주의자들이라도 자기 자신을 위임할 때는 교리를 보고 맡기지 않을 것이다. 자기와 교리가 같은 사람이라 해서 자기 재산을 맡기거나 자기 마음을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맡길 때는 그 사람의 인격을 보고 맡길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지식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속아 있기 때문이다.

속은 사람은 “당신은 속아 있습니다.”라고 말해 줘도 속은 줄을 모른다. 오히려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돌을 던지게 된다. 속아 있는 사람은 속은 줄 모른다. 속은 줄 안다면 누가 속고 있겠는가? 바둑을 두면서도 속은 줄 알면 지지 않는다. 속은 줄 모르기 때문에 지는 것이다. 속은 줄 알고 지는 사람은 없다. 장기 한 판을 두더라도 속은 줄 알면 지지 않는다. 속은 줄 모르기 때문에 지는 것이고, 진 다음에야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장기도 바둑도 사기이다. 한 수 앞서서 속여먹는 것이다. 자기는 다음 수를 알고 있는데 상대방은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이용해서 속여서 이기는 것이다. 다 가르쳐 줘 버리면 이길 수 없다.

결국 자신을 위임하기 위해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인격을 찾는다. 하나님도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인격을 찾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영과 혼과 몸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영이 어떻게 온전하게 보전되는가?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막막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영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떠벌리고 있다. 영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단지 자기의 어떤 느낌을 가지고 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집회에서 영이 흘렀다.”고 하는데 어떤 감정이 흐른 것을 두고 영이 흘렀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어떤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을 두고 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렵다.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이나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따른다는 사람을 보면 엉뚱한 경우가 많다. 결국은 그 사람의 사람됨인데 그것은 빼놓고 “영을 따른다. 성령을 따른다.” 하며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에 자기 자신이 숨어 있는 것이다. 참으로 성령을 따라 행하려면 온전한 인격이 있어야 한다. 성령은 인격을 통해 흐르고 역사(役事)하는 것이다.

바울이 왜 영과 혼과 몸이라고 하였는가? 우리의 몸은 보이지 않는 데서 보이는 데로 표현되어 있다. 보이는 부분은 ‘몸’이라 하고, 생각하는 부분은 ‘혼’이라 하고, 생각 이전의 어떤 부분을 ‘영’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안 보이는 데서 보이는 데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 모든 만유가 다 그렇게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그렇게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온전하게 보전되는 길은 무엇인가? 십자가 안에서 우리 자신의 운명을 내놓고 서는 것이다. 거기서 내가 진실해지고, 깨끗해지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는 자리에 서야 진실해진다. 창고를 짓고, 쥐구멍을 막고, 쥐약을 놓는 것을 걱정하는 데서는 진실이 안된다.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말씀 앞에 있을 때 진실해진다. 거기서 내 진실이 드러나 버린다. 이와 같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그 진실이 흠 없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영이 온전하게 보전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위치가 먼저 바로 돼야 한다. 사람의 위치가 바로 돼야 한다. 자리가, 우리의 위치가 제대로 되면 우리의 영도 제대로 되고, 생각도 제대로 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제대로 된다면 우리의 몸도 제대로 따라갈 것이다. 우리의 몸은 생각에 따라 좌우된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내 생각 때문이다. 내가 오늘 서문 시장에 가는 것도 내 생각 때문이다. 그러니 내 몸은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이다. 생각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면 내 몸도 정상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하도 험악하다 보니까 우리의 몸까지라도 허랑방탕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몸을 아무데나 써서는 안된다. 아무 데나 버리거나, 불필요한 데다 우리의 몸을 내놓아서는 안된다. 더러운 데다 내놓아도 안된다. 더 중요한 데 사용할 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을 더 온전하고 더 필요한 데 사용할 데가 있으니까 아무데나 사용해서는 안된다. 공연히 싸움질을 해서 얻어터지고 얼굴에 상처가 났다면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데 지장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의 몸 하나라도 소중한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험상궂은 얼굴을 가지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표현하겠는가? 더럽혀진 몸을 가지고 어떻게 그리스도를 표현하겠는가? 그래서 몸을 보전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생각을 보전하고 몸을 보전하고 영을 보전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쓸 데가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하였다. 그분은 우리가 온전하게 보전되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갈망하신다. 그분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등(燈)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좋은 불빛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 공장에서는 더 좋은 등을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다. 좋은 등, 더 좋은 등, 더 나은 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 우리는 옛날보다 더 좋은 등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도 더 좋은 등을 만들기 위해서, 그가 미쁘시기 때문에 노력하시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미쁘심을 안다면, 그분이 그렇게 하실 것으로 안다면, 기왕 내가 그렇게 될 것이라면 내가 협력하면 더 빨리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그렇게 될 텐데 뻗대고 있으면 되겠는가? 빨리 협력하면 빨리 가게 된다. 그래야 늙기 전에 주님을 위해서 쓰여질 수 있다. 그러나 뻗대고 있다 보면 시간은 흘러가 버리고, 쓰일 시간이 없게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쓸 수 없고 그분도 쓸 수 없는 몸이 돼 버리고 만다.

우리 인생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런데 시간은 너무나 짧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질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 인생을 조금이라도 흠이 있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내가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흠이 있으면 그것이 약점이 되어 송사를 받게 된다. 결국 그것이 우리를 약화시키고 길을 막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그분이 임하실 때, 지금도 장차도 언제든지 그분과 함께 있을 때 그분을 손상 없이 표현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분이 나타날 때 나로 손상 없이 나타나고, 그분이 표현될 때 나로 손상 없이 표현되어 그분의 기쁨이 되고 만족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영을 받았다며 식식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사람은 엉망진창인데 식식거리고 있다. 속에서 힘은 넘치는 모양인데 사람이 엉망이다. 그리스도가 그런 모양이겠는가? 그런 사람을 통해서는 기껏해야 불이나 바람은 드러낼 수 있겠지만 인격은 드러낼 수 없다. ‘야, 하나님은 무섭다. 하나님은 굉장하다.’ 하는 것은 드러내겠지만 그 인격은 드러낼 수 없다.

어떤 기도원 원장은 “나는 하나님에게 무서운 은사를 받았다. 내가 말을 하면 그대로 돼 버린다.”고 말했다. 저주를 받으라고 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 무서운 은사를 받았는데 자기도 두렵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그리스도가 표현되겠는가? 불덩어리는 표현될지 모르지만 인격은 표현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런 말을 자랑이라고 하는지 부끄러워서 하는지도 모르고 식식거리고 있다. 소주 한 잔 먹고 나면 힘이 생기듯이, 불덩어리가 있으니까 힘은 있지만 인격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안된 것이다. 그러니 앞도 뒤도 모르고, 위 아래도 모르는 것이다. 능력을 받았다는 사람을 만나 보면 같잖은 사람이 많다. 사람 같지 않은 인간이 너무 많다. 자기가 신처럼 돼 버렸으니까 안하무인(眼下無人)인 것이다. 아무에게나 손가락질을 하고 반말을 해대는 같잖은 사람이 돼 버린 것이다. 그런 사람을 보면 기독교인이라는 말을 하기조차 부끄럽고 창피하다. 수치스러울 뿐이다. 사람은 안됐는데 속에 불덩어리를 받아 놓으니까 주체를 하지 못하고 설치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칼을 준 것과 마찬가지이고 개에게 술을 먹여 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개에게 술을 먹여 놓으면 어찌 되겠는가?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다. 그리스도는 불덩어리 바람 덩어리가 아니다. 한 인격이다. 영원하신 인격이고 독생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이고 하나님의 인격이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불덩어리 바람 덩어리만 있으면 되는 줄 알고 날뛰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이 그런 데 휘말려 있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다. 그런 것을 보고 사람이 빨려 들어가서 엎드려 절하고, 잘못했다며 회개하고 빌고 있다. 무당이 뭔가 지적하면서 큰소리로 호통을 치면 앞에서 큰소리 칠 사람은 없다. 혹시라도 저주받을까 봐서 쩔쩔매게 된다. 아무에게나 반말을 해도 꼼짝못하고 돈을 주고 온다. 그런 인간을 보면 너무나 불쌍하다. 내일 일이 어찌 될 것인가, 혹시 벌을 받지 않겠는가 하는 것 좀 알아보려고 하다가 얼마나 창피를 당하고 오는가! 그런데도 창피한 줄도 모르고 그 짓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흠 없는 인격을 필요로 하신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우리의 인격이 온전하게 보전되기를 원한다. 영과 혼과 몸이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온전하게 보전되기를 원한다.

바울은 왜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 편지를 썼는가? 이 목적 때문에 쓴 것이다.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영과 혼과 몸이 온전하게 보전되기를 위해서 썼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에게 상당한 염려가 있었다. 혹시 잘못되지는 않을까, 혹시 잘못 자라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이 편지를 썼고 디모데를 친히 보내어 그쪽 사정을 알아 오게 하였다. 바울은 3주밖에 그들과 함께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단히 기쁜 보고를 듣게 되었다. 그들이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린아이처럼 온전하게 자라서 그리스도 강림할 때에 흠 없는 신부로 드러나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시고 표현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다 먼지와 같고 흙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당신의 거룩한 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를 빚으시고 또 빚으시고 다듬으시고 또 다듬으셔서 흠 없게 우리를 만드시고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세우셔서 우리를 기르시고 양육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와 같은 거룩한 뜻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 우리도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당신이 사용할 때 당신이 필요로 할 때 온전하게 보전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