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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3년 11월 17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1:17-18 -
성경 본문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요1:17, 18)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육체다. 그는 창조자이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는 보여주시는 분이고 우리는 보는 자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면 인간은 그를 볼 수 없다. 그런데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그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으며, 신약에서 사도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보여주셨다고 했다.
선지자들은 나타내 주신 표적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음.
모세는 불 가운데서, 에스겔은 영광 가운데서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 (신4:33,36. 겔1:28 참). 그들은 표적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선지자란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이다. 이것이 어떤 것인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알기 어렵지만 모세는 이렇게 음성을 듣고 바로에게 나아가서 이스라엘을 내놓으라 하였고 그 백성을 구속하여 광야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어 자신의 음성을 대변하게 하시고 듣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음성을 거부했다고 한다 (수5:6,시95:7참).
그런데 선지자들은 표적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들은 보여주신 표적을 해석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표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무나 그의 표적을 보고 그의 말씀을 들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시대의 한계였다.
사도들은 예수를 보고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였음
“자고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으므로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 바요, 들은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하였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을 현시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히1:1참). 물론 이러한 방법들은 인간의 상태와 무관하지 않으므로 그의 현시는 점진적이다. 인간이 사물을 보고 아는 것은 점진적이다. 일반적으로는 성장과 관계되고, 역사적인 경험과도 관계되며, 인격적인 부분에서는 인격의 입장과 상태와 관계된다고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1:1) 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들을 보고 그의 말씀을 알아들었던 사도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으면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자신을 보이시려고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와 실재로 충만케 하셨다. 충만이란 온전하다는 뜻이다.
율법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적임
율법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성질과 마음이 표현된 것이다. 명령은 명령자의 의도와 계획을 표현하는데, 그 안에는 그의 본성과 성질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의 명령을 들은 사람은 어떤 표적보다도 확실한 하나님의 표적을 본 것이며 그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그의 음성을 알아들은 사람은 그를 안 것이며 본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랑의 표현임
희랍인들에게는 은혜란 말은 단순히 우아함, 아름다움, 매력이란 뜻이지만 유대인들에게 은혜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구원과 관계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관심과 돌보심과 베푸심과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백성이다.
그들은 생존이 위협받는 약한 민족으로서 절대적인 보호가 필요한 백성이었다. 에굽에서,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서, 바벨론에서 전능자의 도우심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였다.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은 그들의 생명과 직결되고 생존 자체가 은혜와 관계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능자의 도움은 초자연적으로까지도 베풀어졌으나 시간과 상황이 바뀌면 언제나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에 베푸셨던 은혜는 무효화되고, 다시, 또 다시 은혜만을 반복 요구하는 그야말로 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백성의 감사와 원망은 되풀이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발전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온전하게 되었다. 은혜는 구원을 위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스라엘이 현실에서 나약한 민족이었기에 어느 때고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고 안식이 없었던 것같이, 인생은 위치에서 이탈되어 하나님의 보호에서 떠나 있으므로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불안하여 만족이 없고 감사가 없다.
인생으로서 만족하고 감사하려면 인생의 위치가 회복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행복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구속하심은 인생의 위치를 회복시켜주고, 그의 부활 안에 있는 새 생명은 영광을 보장한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며 완전하다.
실재는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완전임
희랍인들은 형상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고 영원한 실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다 추상적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만족이 없고 결국 추상적인 피안의 세계에 막연한 희망을 두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심으로 실재가 나타난 것이다. 그 안에는 오로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된 실재뿐이다. 형상이기 때문에, 차안이기 때문에, 육체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없어서 문제라는 것이다. 씨가 없고 주인이 없는 땅은 황량한 것이며, 하나님이 없고 목적이 없는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창조세계는 모두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도록 되어 있다. 창세기의 계시는 처음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창1:2).고 했는데 마지막에는 하나님은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하셨다. 이래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게 하셨던 것이다 (창2:24,25). 씨도 부끄럽지 않게 하셨고 땅도 부끄럽지 않게 하셨다. 이것이 참이요 실재다.
차안에는 실재가 없고 피안에는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에게 하나님이 없으면 여기에서나 저기에서나 모든 것이 다 미완성이고 모든 것이 다 불완전하다. 언제까지나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합하면 여기서나, 저기서나, 언제나, 즉시 참이요 실재다.
그러므로 은혜와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있고, 하나님은 그의 말씀하심 안에 현시되므로 알아들으면 그를 알고, 그를 알면 그를 본 것이다.
나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이 나를 위해서 하신 일과 내게 두신 계획을 알고난후로부터 지금까지 그토록 보고 싶고 만나보고 싶었던 하나님,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않고 살아왔다. 배가 부르자 음식 생각이 없어진 것과 같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