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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3년 11월 24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1:29 -
성경 본문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요1:29
요한복음은 태초에 계신 말씀, 모든 것이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는 말씀이 우리와 연합하여 생명이 되려고 아들(인격)로 왔다는 것을 말하고, 이어서 열두 가지 사례들을 들어서 생명의 표적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인격이 우리와 연합하여 생명이 되려면 먼저 죄라는 장벽이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세례요한의 증거를 삽입하고 있다. 그는 예수를 보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하였다. 짊어졌다는 것은 없애는 것이다. 죄를 없애고야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은 죄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 성경에는 이 죄라는 문제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절대적인 장벽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주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 중에 희랍인들은 그것을 로고스라 했고, 인도인들은 브라흐만이라고 했으며, 중국인들은 천리, 혹은 도라고 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원리에 의하기 때문에 이 원리를 어기면 어리석음이고 이 원리를 깨달아서 실천하면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어리석음이냐 지혜로움이냐 만이 문제가 될 뿐이고 죄란 의식에 없는 것이다.
우주, 즉 자연은 분명히 어떤 원리가 있어서 운행되고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전능자의 말씀하심이라고 믿고 있는가? 그들은 자연 안에 내재하는 원리 밖에서 말씀하신 이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의 손에 억류되었을 때 우주를 움직이는 자연의 원리에 따라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전능자의 말씀하심으로 구원을 받은 특별한 경험을 가짐으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믿음이 형성된 것이다.
그 믿음은 자연히 전능자(자기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하나님)가 천지를 창조했고, 인간은 그의 특별한 목적으로 지어졌으므로 그 전능자는 인간과 특별한 인격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운행의 원리를 깨닫는 것과 다르고, 또한 인간의 소원과 상상으로 만들어진 원시종교의 우상숭배와도 다른 것이다. 그 전능자는 자기들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신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자연은 분명히 그 안에 법이 있고 원리가 있어서 누구의 관리도 없이 스스로 움직여 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이라고 한다. 즉 스스로의 이유(연)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이 원리를 깨닫고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모든 것은 인연을 따라서 움직인다.”고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연기의 법, 즉 인과법인데 이것은 진리다.
그런데 인간은 그 물질적 부분을 제외하고는 이 법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가에서는 자연의 순환에서 해탈하여 완전한 자유에 이르려고 하고, 도가에서는 자연을 이용하여 장생을 누리려고 하며, 유가에서는 물질과 정신을 하나로 보기 때문에 자연을 천명으로 보고 그 명에 순응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연의 법칙을 초월할 것이냐 순응할 것이냐가 아니라 자기들의 구원자요 창조자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바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 관계에서 정상을 의라 하고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죄관은 하나님 같이 되려고 자신의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여 마귀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지음 받은 인간이 그 목적을 무시하고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겠다는 것이니까 이보다 큰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거역일 뿐 아니라 반역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이 문제는 반드시 선결되어야 한다.
이 방법을 계시하기 위해서 보여준 것이 성막의 모형이다. 성막은 백성이 하나님과의 교통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묘사한 것인데 그 입구에 번제단이 있다. 번제단은 백성을 대신하는 제물을 잡아 피를 받고 나머지는 불사르는 곳이다. 그리고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여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 제물은 백성을 대신했고 그 피는 백성의 생명을 대신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서 하나님이 다시 거두시는데 이것으로서 거역과 반역의 죄가 청산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실제적인 문제에서 어떻게 제물로서의 양, 즉 내가 아닌 남이 내 죄를 대신하느냐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제사장 가문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그는 제물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보고 인류의 죄를 짊어질 제물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어떻게 짊어질 것인가? 그는 아직 십자가를 지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전에도 그는 하나님의 목적 안에 지어졌으나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죄를 짊어지신 분이었다는 것이다.
인류의 죄는 아담 안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일이 스스로 안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마귀는 자기가 하나님같이 되려는 자이므로 인간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그를 표현하기 위하여 산 혼으로 지어졌다. 밭과 같다. 누가 와서 씨를 뿌리면 받아서 생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밀을 뿌려놓은 밭에 마귀는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고 했다(마13:35참).
아담은 마귀의 계략에 말려들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도 같은 유혹을 받았으나 물리치셨다고 했다(마4:1~참). 아담이 물리치지 못한 일을 예수께서는 어떻게 물리치셨는가? 어린 양으로, 번제단에 드려진 제물로서, 인간의 위치에서, 인격으로 물리치셨다.
마태와 누가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귀를 물리친 사건을 기록했고, 요한은 세례요한, 즉 백성의 죄를 처리하는 제사장의 증거를 기록했다. (요한은 제사장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설이 있음) 예수께서는 백성을 위하여 번제단 위에 드려진 제물의 자리에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써 죄를 없애신 것이다.
예수 안에서 죄는 처리되고 없어졌다. 마귀는 처리되고 죄는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면 죄가 없어지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열리게 된다. 바울은 이 사실을 우리가 "한 사람의 순종하지 않음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 되리라"고 하였고(롬5:19). 또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하였다(롬5:14)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 하였고, "이와 같이 너희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 하였다.(롬6:8~11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