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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4년 1월 5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아버지와 함께하는 아들의 표적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4:43~5:47 -
성경 본문
4: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4: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4: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4: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4: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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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아버지와 함께하는 아들의 표적 ( 요4:43~5:47)
4장에는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나로 가셨는데 왕의 신하라는 사람이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왔다는 얘기가 있고, 5장에는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물이 동할 때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38년 된 환자를 만났다는 얘기가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영접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유대를 떠나 갈릴리 가나로 가신 것은 환영하지 않는 예루살렘에 있는 것보다 오히려 첫 번째 표적을 행하셨던 곳으로 가신 것이 낫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육신적 고향은 아니지만 성전이 있고 경배가 있는 이스라엘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종교와 전통과 규례들과 관습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곳, 갈릴리 가나로 가신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 가시자 왕의신하라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살려 달라고 가버나움으로부터 찾아왔던 것이다. 왕의 신하란 바실리코스(basilikos)로서 작은 왕이라고 할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가버나움은 가나로부터 32k나 멀리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 사람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모시러 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 당신의 아들이 살았습니다.”라고 하셨고 그 사람의 아들은 그 시로 나았음으로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믿었다는 것이다. 복음은 예루살렘을 떠나 멀리 다른 민족들에게로 전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명절이 있어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고 거기 행각 다섯이 있어서 많은 병자들이 물이 동할 때 먼저 뛰어들어 고침을 받으려고 대기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베데스다는 자비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고 간헐천으로서 가끔 물이 끌어 오르는데 이를 천사들이 움직인다고 믿고 있었고 그 때 먼저 뛰어 들어간 사람은 무슨 병이 들었든지 다 낫는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연못가에는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행각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 환자를 찾아가서 “낫고자 합니까?”라로 물으셨다. 그가 “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 일어나 자리를 들고 가시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는 것이다. 이 날은 안식일이었다.
왕의 신하의 아들과 38년 된 환자는 모두 그들의 사정이 어떠하든지, 그 날이 무슨 날이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죽어가던 아이는 살아났고, 걷지 못하던 사람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38년 된 환자가 걸어가게 된 날이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반박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 하시니 나도 일 합니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합니 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 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립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입니다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등등의 말로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아들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주장하신 것이다.
이런 주장은 유대인이 들을 때 누구나 저가 신성을 모독하는 구나, 아니면 메시야 다 라고 듣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듣는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중에 하나, 즉 신성모독 자냐?, 그리스도냐? 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께서 주장하신 것은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일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누가 아들인가?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시행하는 자이지만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일 하는 자다. 아버지의 일이 곧 아들의 일인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일하심에서 하나다.
왕의 신하의 아들은 높은 신분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생명이 죽어가고 있었고 38년 된 환자는 방법이 있어도 자신의 능력이 없어서 치료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모두 종교와 율법아래 있는 인생의 상태를 상징하고 있었다.
인간의 생명과 능력은 한계가 있다. 생명은 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가고 있음으로 종교가 소용없으며, 인간의 지식과 능력은 신성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높은 신분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생명이며 율법의 많은 방법들이 있어도 내게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과 성전과 율법이 있고 신성하고 고상한 전통과 관습들이 있다. 베데스다 연못은 자비의 연못으로 알려졌다. 중재하는 천사, 물이 동하는 기회, 기다림을 위한 행각들, 그리고 먼저만 들어가면 무슨 병이든지 다 낫는다는 길이 있었다.
왕의 신하라는 사람은 높은 지위에 있었으나 죽어가는 아들을 사릴 수 없었고, 유대종교는 있을 것은 모두 갖추고 있었으나 이 환자는 남보다 먼저 뛰어들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아 아무리 권세가 있다 해도 생명을 살릴 수 없고, 유대종교가 아무리 위대한 방법이 있다 해도 인간이 그것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롬8:3참). 이런 인간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일하시는 아들이 필요한 것이다.
아들은 각자에게 맞는 처방이 되신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에게는 장대에 달린 놋 뱀으로써, 목이 마르고 부도덕한 여인에게는 생명의 물로, 죽어가는 아이에게는 생명으로, 걷지 못하는 자에게는 일어나 걷는 능력으로 각자에게 맞는 처방이 되셨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정형화 되고 굳어진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문제로 다가 왔다. 예수는 신성모독을 하는 없이해야 할 대상인가, 아니면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야인가?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안식일이면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말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한다.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긴다.”라고 보고 죽이려고 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동일성(identity)을 동등성(equality)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호와와 자기가 동등하다 한 것이 아니었다. 함께 함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왕이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대행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이고, 제사장이 백성을 대신함에 있어서 백성과 하나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것은 존재적 동등성이 아니라 함께 함에 있어서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왕으로도, 선지자로도, 제사장으로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등성으로만 받아들인 것이다. 지식으로 타락한 인간 안에는 동등이라는 개념은 있어도 하나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사상은 오늘날도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지식나무 열매를 받아들였을 때 이미 분열이 시작 되어 바벨로 막을 내렸다. 그러므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저들도 다 우리 안에 있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다. 하나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말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혈통에서 하나이고, 사랑에서 하나이고, 일에서 하나이다. 예수님 안에서는 이것이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나타났다.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이루어 그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 하였다.그는 독립적으로 일하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이것이 하나다.
아버지와 하나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아들은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심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에서 예수는 그 쎔플이요 기준이며 표적이시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하자. 우리가 거짓말 하는 자 안에 있지 않고 참 되신 자 안에 있게 하신 것을 찬양하자! 거짓말 하는 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기를 원하는 자로써 인간을 타락시켰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참 아들을 찬양할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