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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2년 6월 10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생명의 건축과 건축자(10)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10:44-53 -
성경 본문
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11: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11:53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생명의 건축과 건축자
생명의 번식(건축)을 위한 한 알의 밀(11:~21:)
2. 죽음의 길로 가심
b. 부활이요 생명으로
2) 온 백성을 살리러 가심(요11:45~53)
부활생명으로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은 또 다시 자신의 죽으심으로 만민을 살리게 되었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렸다는 소문이 퍼지자 유대 종교의 최고 통치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가 소집되어 대책이 결정 되었는데 예수를 당장 죽여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고 그러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갈 것이라” 는 것이었다. 메시야 운동이 일어나면 자기들은 기득권을 잃을 것이고, 로마 당국이 유대를 아주 멸망시켜버릴 것이라는 것이었다.
산헤드린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로 구성되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준수하여 현세를 축복으로 누리고, 마지막 날에는 부활하여 영생할 것이라고 믿는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며,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나 제사장 가계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성전의 수입으로 현세에서 안정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종교-정치적 실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두 파는 모두 그나마 로마 당국의 허락 아래서 종교와 현실의 안전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평소에는 종교문제로 반목하는 사이였으나. 종교 정치적 안전보장을 위해서 예수를 죽여 희생양을 삼아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던 것이다.
이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 그해의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예언을 인용하여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수를 희생양으로 삼아야 한다는 암시적 선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라” 고 해석하고, 이 날부터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요한은 참으로 예수 안에 있었던 신기한 사람이었다.
가야바의 말은 대속적 고난에 관한 예언(사53장)을 인용하였으나 내심은 음흉하고 잔인한 계략적인 말이었다. 백성을 위해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단지 자기들의 기득권 안에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예수 한 사람만 죽여 없애면 만사가 다 편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다. 정치가가 이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어쩌면 현명한 일일 수도 있다. 정치와 전쟁은 다수를 위해서 소수를 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백성을 대신하여 그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제사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제사장은 희생양에게 안수함으로써 희생양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자기가 희생양이 아니면 그 제사는 거짓 제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가야바는 거짓 제사를 드려 하나님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인의 제사인 것이다.
가인의 제사는 여기서 끝나지만은 않았다. 종교와 교권을 정치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였으며 핍박을 했던가? 그들은 하나같이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성경을 지키기 위해서, 라는 명분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야바는 지금도 이런 음흉하고 잔인한 예언을 계속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성경은 이런 방법으로, 즉 반대자를 핍박하거나 죽여서 보호 되거나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야바의 제사는 가인의 제사와 같은 것이다. 가인은 아벨만 없애면 제사(예배의 독점권)는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피를 흘림으로써 하나님이 지으신 땅으로 저주를 받게 하였고, 그 때부터 세상 끝 날인 계시록의 때까지 아벨의 피가 제단 아래서 원한을 갚아주시라고 신원하게 한 것이다.(계6:10참)
그런데 요한은 가야바의 이 교활한 말을 놓고도 주 예수님이 죽임 당하심으로 만민이 구원을 받을 것을 미리 말한 것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물론 그도 당시에는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구속사역을 보고나니까 가야바의 교활함 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데 사용 되었다는 것을 승리자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사단은 가야바-가인을 앞세워 예수를 죽이기로 결안하게 하였고 가롯 유다를 내세워 예수를 팔아넘기도록 조정하였으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을 역이용하여 아들 예수로 하여금 모든 사람을 살리는 구속의 승리자가 되게 하셨던 것이다.
예수는 승리자시다. 그에게는 죽음으로 가는 길도 나사로를 살리기 위한 길이 되었던 것처럼, 그의 길은 선지자로 예언되었던 길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예비하신 길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단의 모든 방해를 역이용하여 최종적 승리를 거두신다. 그러므로 그의 길에 있는 자는 모든 경우가 다 복이 되며 승리가 되는 것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빛이 왔고, 사망의 물에서는 땅이 드러났으며, 생명 없는 땅에는 씨 맺는 나무와 채소가 났고, 텅 빈 공중에는 새들이 날며, 무서운 바다 속에는 고기들이 헤엄치게 되었고, 황량한 땅에는 동물들이 뛰어다니고.......흙으로 사람을 지으셨고 생기를 불어넣어 산 혼이 되게 하셨으며 그 사람을 하나님의 동산에 두어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게 하셨다. 이것이 참 승리요 축복이 아닌가!
승리자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승리를 위한 재료와 조건이 되고, 패배자에게는 모든 것이 다 패배의 재료와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은 영원하고 완전한 승리자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자들로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좋은 것으로 누리는 것이다.
승리자 앞에는 모든 것이 전리품이다. 부정적인 모든 것이 다 긍정적인 것으로 바뀐다. 적진은 나의 요새가 되고, 대적은 나의 부하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안에서 해석하고 수용하고 적용하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의 마지막 승리의 나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할 것이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가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할 것이다”(고전15:5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하신다. 주님은 죽으심의 길에서도 나사로를 살리시고 만민을 살리셨다. 승리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