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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2년 6월 3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생명의 건축과 건축자(9)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10:40-42 -
성경 본문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11: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11: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11: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11: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11: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생명의 건축과 건축자
생명의 번식(건축)을 위한 한 알의 밀(11:~21:)
2. 죽음의 길로 가심(요11;1-44)
b. 부활이요 생명으로(11;17-44)
1) 나사로를 살리심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 근방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으로 가셨다. 죽이려는 사람들은 가까이 있었고, 그 집은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고 있는, 죽음이 온통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생명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시려고 그곳에 가신 것이다.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있은지가 이미 나흘이었다.
살아날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와 있었으나 생명을 가지고 살리려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단지 가족들을 위로하려고 온 사람들뿐이었다.
또 그들 중에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고 비아냥 거리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르다 역시 급히 마중을 나왔으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라도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하셨으나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하니, 주님은 다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셨고 마르다는 "예,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었나이다.“ 라고 했다.
뒤에 나온 마리아도 무덤에서 돌을 옮기라고 했을 때는 ”죽은 지가 나흘이 되매 냄새가 납니다.“ 라고 했고, 주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았던 것이다.
죽음이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모두 정답을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들 지금 살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고 다만 그들의 종교적인 지식과 신앙심을 표현하는 것뿐이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께 감사하고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고 그는 수건을 동인 채로 나왔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믿음은 이것을 받아들인다. 주님은 생명을 주러 오신 좋은 목자시고, 우리는 그에게서 새 생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새 생명 안에서는 이 사건이 새롭게 조명 되고 경험 된다.
나사로의 썩어가던 시체는 다시 살아났다. 성경에는 이런 예가 더러 있다.(마9;18~) 그러나 모두 다시 죽을 육체였다. 주님은 이 육체를 다시, 또 다시 살리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부활이요 생명으로서 영생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부활의 예고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활 안에서 홍해와 만나와 죽은 자 살아남을 새롭게 경험하고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나사로가 살아남을 보지 못했다. 이와 같이 홍해가 갈라진 것도, 만나가 내려온 것도 본 일이 없다. 이것은 우리가 그 사건의 현장에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생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 우리 생명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알 것은 언제 알아도 알지만 모를 것은 영원히 모르는 것이다.
주님은 새 생명을 주러 오셨다. 생명이 달라지면 보는 것과 아는 것과 누리는 것이 달라진다. 하루살이가 모르는 “내일”을 파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옛 생명 안에서 모르는 일을 새 생명 안에서는 당연히 안다는 것이다.
요한은 베다니의 현장에서 나사로의 살아남을 직접 목격했었지만 그 때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알았더라면 주님을 십자가에 버려두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달아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사로의 살아남과 예수의 죽으심이 연결될 수 없었던 것이다. 썩어가는 시체도 살리는 사람이 왜 자기는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제자들의 의문이었다. 그러나 새 생명을 받은 후에 주님께서 그때 믿음 없는 자들을 보시고 왜 통분히 여기셨던가를 알고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안 것이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안 것이다.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으로서 우리에게 오셨으나 그와 우리의 육신이 그것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는 그 육신을 해체시켜 주었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은 생명의 번식을 위한 씨가 되어 믿는 자들 안으로 한정 없이 해방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에 찾아오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오히려 우리가 받은 참 생명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홍해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영원히 해방시켰고,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밀가루 반죽이 떨어지자 만나가 내려 애굽의 양식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
애굽의 양식은 이스라엘을 사백 년 동안 노예로 묶어 놓았던 쇠사슬이었다. 그런데 그 양식이 떨어지자 백성들은 얼마나 모세를 원망했던가! 인간은 그 누구도 이 양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만나는 그들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부정적인 것들은 우리를 더 묶어놓으려고 원망과 불신과 절망으로 에워싼다. 그러나 새 생명은 그 자리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우리의 믿음과 주님을 향한 사랑이 필요하다. 주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요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나사로의 집에는 죽음 뿐이었다. 어느 곳에도 생명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죽음 뿐인 나사로의 집에 있는 것이다. 세상과 종교와 육체는 우리를 우는 사자처럼 두루 삼키려고 에워싸고 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산 생명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