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2012년 7월 28일
제목: II. 사람을 새롭게 함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고후 5:17
-
성경 본문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말씀 요약
II. 사람을 새롭게 함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 만물은 사람에게 그 이름이 맡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새로워지려면 사람이 새로워 져야 한다.
1. 사람은 새로워 질 수 있음
사람은 전능자가 흙으로 빚어 생기를 불어넣어 산 혼이 되게 하여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도록 지어졌다. 산 혼이란 흙이나 여자와 같다. 스스로는 기능만 있지만 무엇을 받느냐에 따라서 무엇인가를 생산한다. 흙은 씨에 따라서 열매를 맺고 여자는 남자에 따라서 자식을 낳는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새로워 질 수 있다. 전에 무엇을 생산했던지 지금은 새로운 것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 여자이므로 가능함
여호와께서는 먼저 유혹을 받았던 하와에게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3:15참). 하와는 약하여 뱀의 유혹을 받았으나 여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승리자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자-인생은 약하므로 사단의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여자는 스스로 자식을 낳을 수 없지만 남자를 만나면 자식을 낳는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얼마든지 새로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에게 하나님 아들을 낳을 것을 약속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나. 흙으로 지었으므로 가능함
하나님은 남자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여자에게 두셨다(창3:15참). 그 이유는 여자는 그의 성질이 흙과 같아서 언제든지 새로운 열매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흙이나 그릇이나 여자는 무엇에 의해서, 무엇을 위해서, 살게 됨에 따라서 변화되는 존재다. 흙은 씨에 따라 콩밭이 되기도 하고 팥 밭이 되기도 한다. 그릇도 그렇고 여자 역시 그렇다. 그러므로 새로워 질 소망은 항상 있는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 받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근본 재료가 흙이라는 것이다. 흙은 콩도 아니고 팥도 아니다. 그런데 흙은 신비롭다. 콩 심으면 콩 나오고 팥 심으면 팥 나온다. 흙-인생은 변화될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다. 산 혼이므로 가능함
사람은 근본 재료가 흙이므로 능력이 천사보다 못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육체를 벗고 영적인 존재가 되려고 한다. 천사는 하나님과 방불하다. 그래서 천사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리는 영에 불과하다(히1:14참). 그런데 사람은 산 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천사보다 월등한 하나님 아들이 되어 그의 기뻐하심만큼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산 혼은 무엇이나 보고 듣고 만짐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표현하는 기능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 기능으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표현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물 중에 유일하게 사람-산 혼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만유에게 표현하고 분배하는 자로 지음 받은 것이다.
그런데 산 혼인 사람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정해진 코스에서 이탈했다. 그 흙이 밭의 길을 이탈했고 산 혼이 하나님 표현하는 아들의 길을 이탈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범죄요 타락이다. 원래의 궤도에서 이탈한 것이다.
라. 벽돌이 되므로 생명이 없어졌음
흙에게 정해진 가장 좋은 길은 밭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았다(창11:3참). 인간이 벽돌을 좋아하다가 벽돌이 된 것이다. 벽돌은 견고하지만 변화가 불가능하다.
바벨은 벽돌로 건축되었다. 벽돌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바벨의 근본 재료다. 벽돌에는 생명이 없다. 콩을 심어도 나지 않으며 팥을 심어도 나지 않는다. 영원한 죽음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산 자의 하나님은 거기 계실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최후의 심판이며 멸망이다.
벽돌이 변화 되어 밭이 되려면 죽음밖에는 길이 없다.(요3:3, 고전15:36참) 그러므로 인류는 다시 하나님의 밭이 되기 위해서 예수의 죽음 안에서 구속을 받고 그 안에 있어야 한다.
마. 여호와는 산 자의 하나님이심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는 말씀은 얼마나 은혜로운 복음인가! 여호와란 이름은 자음만 있기 때문에 모음 붙기에 따라서 다르게 읽힐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산 자의 하나님이므로 고정되지 않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의 이름은 여호와 곧 “나는 ~이다.” 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그의 만드신바 인생도 씨를 받기에 따라서 생산이 달라지는 밭과 같은 것이다. “인생은 ~이다.”로서 씨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즉 인생은 얼마나 복된 존재인가! 하나님이 그런 분이니까 사람도 그렇게 지으신 것이다.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는 인생은 얼마나 풍성하며 소망이 넘치는가! 이런 변화가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는가! 그러므로 얼마든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바. 새사람을 지으심
1) 옛 사람을 폐기하심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들고 그것으로 바벨을 건설했다(창11:3참). 그런데 야곱 족속은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의 국고 성을 건축하기 위해 벽돌을 굽는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출1:14참).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벽돌로 견고한 성을 쌓아 놓고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지킨다고 목숨 걸었던 민족이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벽돌을 좋아하다가 벽돌이 된 사람들은 살아 계신 여호와의 아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생명의 말씀까지도 벽돌로 구워서 보존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뀌지 않는 자기 이름을 만들려고 애를 쓴다. 결국 벽돌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바벨은 벽돌로 쌓은 성이다. “견고하게 구워서 견고하게 쌓자!”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벽돌 같은 사람이 되어 벽돌로 된 성(사회)을 쌓아 놓고 무엇이나 벽돌처럼 구워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벽돌을 굽는 일은 인생고의 상징이 되었다(출1:14참).
천사는 능력이 있지만 고정되어 있는 존재다. 그래서 타락한 천사인 사단은 사람도 자기와 같이 고정되기를 좋아하도록 만들었다. 사단의 종이 된 사람은 개선할 수가 없다. 천사를 개선할 수 없듯이 그의 종들도 개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폐기 처분하고 다시 지어야 한다.
남자는 환경과 투쟁하다가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고 여자는 새로운 씨를 받아서 승리자를 낳을 것이라고 했다. 벽돌이 밭이 되어 생명을 생산하려면 부서져서 흙-여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십자가는 이미 정해진 길이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2) 새사람을 지으심
로마서 6장 6절에는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라고 하였다. 로마서 6장 8~10절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라고 하였다.
아담은 죄에 대해서는 살아 있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죽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죄에 대하여는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나신 분이다. 인간들은 죄에 대해서 살아 있는 것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을 창조하신 이가 보실 때는 죽은 것이다.
그분의 목적 앞에서 흙은 살아 있는 것이고 벽돌은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벽돌에 대해서는 죽고 흙에 대해서는 살라고 하신다. 벽돌은 만들기가 어렵고 쌓기도 힘들지만 흙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만들려고 애쓸 일도 없고 살려고 고생할 일도 없다. 씨만 받으면 된다. 그러면 새로워지는 것이다.
2. 새롭게 하기 위하여 옛것을 심판하심
로마서 3장 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였다. 지으신 이의 입장에서 볼 때 다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주인에게 쓸모가 없으면 버려지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야 할 인간이 그 길을 벗어나서 자기 영광만을 위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자기 영광만을 위하여 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다 범죄자요 죽은 자다.
죄인에게는 사함을 위하여, 죽은 자에게는 다시 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죄 사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하여, 심판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필요하다. 하나님은 새롭게 하기 위해서 옛 것을 처리하신다.
새롭게 하심의 기준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 중에는 선한 자도 있고 악한 자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에서는 다 이탈되었다. 그러므로 새롭게 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동일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죄목도 한 가지고 심판도 한 가지다.
가. 아담을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하고 죽음으로 심판 하셨음
자신의 위치에서 이탈하여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아담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되었다. 동산은 아담에게 지키도록 맡겨진 곳이며 하나님이 그의 생명으로 아담과 함께 거하는 곳이다. 그런데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에 함께 있을 수가 없고 목적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1) 흙으로 돌아가게 하심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 하신 여호와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라고 하셨다. 죽음은 관계의 단절이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원점으로 가는 것이다.
흙은 원점이기는 하지만 다시 빚을 희망이 있다. 그러므로 이 선고는 복음적인 것이다.
2) 영생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심
창세기 3장 22~24절에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영생에 참여치 못하도록 한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 생명이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다. 동거하려면 서로의 생각과 목적이 맞아야 한다. 아담은 이미 선악을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하나님까지 판단하기 때문에 동거동행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같이 된 자는 그와 동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산에서 추방하신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아담에게도 가장 쉬운 길을 주신 것이다.
아는 것이 다르면 동행할 수가 없고 기호가 다르면 동거하기가 어렵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생명을 대적한다. 날마다 대적하면서 동거하는 것은 사망인 것이다. 그러므로 추방도 축복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그와 함께 동거한다면 영벌에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영생은 아니지만 영벌에 있지 않게 하시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잘못된 사람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축복이다. 새 집을 짓기 위해서 옛 집을 허물어야 한다면 이는 큰 소망인 것이다.
나. 노아 때는 홍수로 심판하셨음
창세기 6장 5~7절에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라고 하였다. 만든 자가 만든 것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다.
도예가들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깨부수는 것을 보면 아깝다. 그러나 그는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과감하게 두드려 부수는 것이다. 다시 만들 수 없다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버리지 못할 것이다.
1) 여호와의 신이 떠남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6:1~3) 하셨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여호와의 신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야망이 있는 줄 아는 사단은 여자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려면 선악과를 먹으라고 했다(창3:5참). 그런데 이제는 그가 사람과 결혼하여 한 몸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거역한 천사들이며, 사람의 딸들이란 천사를 사모하는 인간들이다. 사단은 동산에서는 지식을 먹였고 이제는 남편이 되어 한 육체가 된 것이다.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이다. 한번 빚어서 술이 된 포도는 다시는 포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도, 사단도 서로의 야망을 이루었다. 천사는 몸이 없어서 문제고 사람은 영이 없어서 문제인데 둘이 결합했으니 완전한 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기에 하나님을 더욱 더 방해하고 대항하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셨다. 하나님의 영 대신에 이미 사단의 영이 인간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밭이다. 하나님의 영이 떠났다는 것은 좋은 농부가 떠났다는 것이고, 좋은 씨가 떠났다는 것이다.
2) 노아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언약을 세우심
창세기 6장 6,7절에는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라고 하셨다.
그러나 노아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언약을 세워 생명을 보존케 하셨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창6:8).”라고 하였고,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창6:18).”하였다. 그 사람들의 행위가 패괴했고, 그 시대가 패괴하여 강포가 충만했지만 노아는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께서 그와 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성경에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기록되었다(창6:9). 인간이 생각하는 완전한 자와 하나님이 보실 때 완전한 자는 다르다.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네피림이 완전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완전한 자는 은혜가 필요한 자다.
씨는 옥토를 찾고, 하나님은 은혜 받을 자를 찾는다. 스스로 열매를 맺는 흙은 농부를 대적하고,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는 인간은 하나님께 대적한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었기에 은혜를 받은 것이다. 은혜를 받은 자가 하나님을 찬양한다.
다. 인류는 자기 욕망에 빠져 심판 받음
1)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므로 심판 받았음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인하여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에 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니라(겔14:5).” 하였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다가 심판을 받았다. 세상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병력이 약하고 왕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망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망했다고 한다.
“탐심은 우상 숭배라(골3:5).” 하였다. 탐심은 분수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이다. 아담은 탐심으로 선악과를 먹었고 이스라엘은 탐심으로 우상을 섬겼다. 모세가 더디 오자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소원을 속히 성취하려고 우상을 숭배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조급한 자에게는 더디 오시고 믿는 자에게는 속히 오신다.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면 우상을 숭배하게 되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려면 믿고 따른다. 우상숭배는 탐심이다. 그러므로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2) 인류는 하나님같이 되려다가 심판을 받았음
인류는 하나님같이 되려다가 망했다. 여호와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하셨으나 인류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라며 속이는 자의 말을 듣고 그것을 먹음으로 하나님같이 되어 심판을 받은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고, 하나님같이 완벽해지려고 천사와 결합하여 네피림이 되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하나님같이 되려는 본성이 있다. 종교가 천사를 숭배하는 이유는 신적인 존재가 되려는 것이다. 인류는 천사같이 되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다. 이것은 탐심 중의 탐심이다.
그러므로 이 탐심을 종결해야 한다. 탐심은 옛것을 만들었고 하나님은 이것을 심판하신다. 누가 이것을 종결지을 것인가?
3. 예수는 모든 심판을 종결짓고 부활하심으로 새롭게 하셨음
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
1) 죄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였다. ‘우리 죄’는 무엇인가? 하나님같이 된 것이다(창3:5참). 인간이 하나님같이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거역한 것이다. 개가 호랑이가 되었다면 그것은 분명 개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괴물일 것이다. 이것은 창조에서 빗나간 것이며 거역인 것이다. ‘빗나간 것’ 이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2) 빗나간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함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같이 된 사람은 개별적으로는 네피림이 되었고 (창6:1~4참) 단체적으로는 바벨탑을 건축하고 “우리가 하늘에 오르자, 우리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 하였다.(창11:1~4참) 하나님같이 되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천사와 인간을 결합한 이상적(?) 인간이다. 이는 아담이 소원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들 중에는 바벨을 건설하고 실패하는 역사를 계속하고 있는 자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를 통해 전능함을 얻어 쓰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모양은 달라도 어떤 면으로든 전능자가 되려는 것이므로 빗나간 것이다
3) 어떻게 이 사람을 처리할 것인가?
인간이 인간의 길을 이탈하여 전능자가 되려 하고 있으니 일차적으로는 심판을 받아야 하고 이차적으로는 흠 없는 자로 다시 본래의 목적대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가) 이 죄를 처리할 사람이 필요함
이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죄인을 대표할 자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죄 없는 순전한 인간이 필요하다.
나) 예수 안에서 인류를 심판하심
아담에게 내려진 벌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인간은 위대해지고 큰 업적을 이루었고 혹시 하나님같이 된다 해도 다 흙이라는 것이다. 이보다 명백한 심판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은 종결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능력만 있으면 도덕과 율법과 신앙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죄와 문제를 짊어지고 심판을 종결지을 뿐 아니라 새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서 축복을 회복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같이 되려는 범죄는 아담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 회복도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진다(롬5:15참).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하고 심판을 받으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다) 예수께서는 이 죄를 청산하기 위해 이 ‘죄의 모양’으로 심판을 받으셨음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율법적으로 흠이 없으셨고, 하나님 아들로서 신적인 능력(이적들)을 가지신 분이었다. 그는 아담이 부러워했던 모든 것을 갖추셨던 분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이분과 같은 전능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한 인간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는 아담이 부러워하는 인간 최고의 전능자였으나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진실을 드러내고 죽었던 것이다.
사도들은 이 사실을 두고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으나 죄의 모양으로 심판을 받으셨다고 하였다(롬8:3참). 사람은 전능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같이 된 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명확한 심판이다.
그러므로 누가 동의하든지 말든지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 했던 사단과 그에게 속아서 부풀려 있는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로 인하여 심판을 받은 것이다(고전15:3.히9:28참).
라) 드려 짐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이 사실-예수 안에서 종결 처리 된 심판을 시인하고 받아들이면 진실하고 순전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명을 받고 다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인생으로 드려질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이며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로서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계14:3~5 참).
하나님은 원래 흠이 없게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흠이 없는 자를 받으신다. 흠이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같이 된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속 안에서 모든 사람은 다시 흠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려 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다시 드려 짐을 위하여 구속하셨다. 구속 안에서 하나님께 드려 지면 그의 보좌 앞에서 밤낮으로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은 볼 것이며, 그들의 이마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 있게 되는 것이다(계22:3참).
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
예수의 죽으심 안에서 위치가 회복되어 그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참).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는(우리의 죄)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 있는 사람은 그와 함께 죽었으므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나는 절대로 하나님같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나는 죽었고, 인생의 위치 즉 구속 된 위치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고후5:17참).
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음
요한계시록 22장 3절에는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저주는 없어지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통치)가 구속 받은 사람들에게 임한다. 그의 통치는 죄가 종결되어 저주가 없어진 사람들에게 임한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심판이 종결되고 죄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통치가 그들 가운데 있는 것이다.
보좌는 왕좌, 즉 통치이고 하나님의 통치는 생명의 공급과 은혜 베푸심이다. 그의 다스림은 인간들의 다스림과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라(창1:26,27참) 하셨고, 아담에게는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라 하셨다(창2:15참). 이것은 생명을 분배하라는 것이다. 만물은 사람의 생명의 분배에 따라서 어떤 목적에 사용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는 인생에게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분배하여 주심으로써 그를 대신하여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지고의 축복이며 그의 생명으로 사는 것은 참된 영광인 것이다. 인간이 새의 생명을 분배 받아 그 생명으로 산다면 창공을 날게 될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 받아 살면 하나님 생명을 사는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하나님의 일은 은혜 베푸심을 목표로 시작된다. 성전은 번제단으로부터 시작해서 성소를 거쳐 지성소, 즉 은혜를 베푸시는 곳에 이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번제단에서 죽으셨다. 이것은 죄와 심판을 종결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더 이상 인간은 하나님같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으므로 죄는 종결되었고 은혜의 보좌는 열린 것이다.
라. 부활하심으로 새롭게 하심
1)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심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15:20참). 잠자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여 죽으시고 자기 안에서 잠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첫 열매(부활)로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가 첫 열매가 되셨다(익는다)는 것은 다음 열매들이 익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면 그 안에 있는 자들은 당연히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배가 항구에 도착하면 당연히 배 안에 있는 사람들도 도착한 것이며, 과일이 익으면 당연히 과일 안에 있는 씨도 함께 익는 것이다.(롬6:8참) 첫 열매는 다음 열매들이 올 신호가 된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위한 신호요 약속인 것이다.
2) 함께 죽고 함께 삶
죄가 종결되고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이제 모든 것은 새롭게 되었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옛 세계가 심판되고 종결되면 새로운 세계가 온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는 것이며(롬6:5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사는 것이다.(롬6:8참)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2:20).”
그런데 ‘왜 나는 안 될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죄도 심판도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났다. 이와 같이 새로운 것도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한 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의 죄를 처리하시고 심판을 종결하셨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세상에 온 것이다(롬5:12,19참).
주님이 다 이루셨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 놓았다. 하나님께로 가는 성소의 휘장이 열렸다. 믿고 들어가면 된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해 놓았다는 말이다. 비행기가 만들어졌다 하면 타면 된다. 구속을 받았으면 그대로 살면 된다. 전에는 율법이나 양심으로 행했으나 이제는 구속으로 행하면 된다. 그러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3)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심
가) 부활은 새로운 길임
그리스도는 땅 위에 계실 때 이렇게 저렇게 사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사실 때는 어떤 모양으로 사실지 도무지 모른다.
부활의 삶을 모양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모양으로 부활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어리석은 사람들아, 씨를 뿌릴 때 장래 형체를 뿌리는 자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면서 그 씨에게는 그 씨에 맞는 형체를 하나님이 친히 주신다고 하였다(고전15:35~38참).
하나님은 모양이 없고 그의 길은 이정표가 없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역시 그렇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따라서 광야를 통과할 때 이정표가 없었다. 구름 기둥이 뜨면 가야 했고 구름 기둥이 앉으면 멈춰야 했다. 지도를 놓고 갔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이며, 내 모습은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알 수 없다.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나는 말씀에 이끌려서 왔을 뿐이지 내가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떤 모양이 될 것인지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그러나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셨다.
나) 나타내심을 보고 따라서 삶
우리 죄는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그 심판이 종결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되었다(고후5:17).” 새것이니까 새것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의 시제는 모두 과거형이다. 앞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롬6:8).”, 이것이 믿음이다. 그리스도가 죽은 것은 확실한 사실이고 내가 그 안에 포함된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와 함께 살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언제 어떠한 모양으로 나타나실지 모른다. 제자들도 십자가는 언제나 확인할 수 있었지만 부활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분이 행하신 것을 보고 우리는 뒤따라가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을 알고 그가 행하신 일을 아는가? 그가 나타내심으로 그를 알고, 행하신 일을 보고 믿는 것이다. 산을 보고 산을 알며, 바다를 보고 바다가 지어진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희랍인들은 나타내시지도 않는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막상 지어진 것을 보고는 또 믿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신들의 생각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에게 나타내신 여호와밖에는 아는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다.
창조와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친히 나타내실 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타내심을 보고 그 뒤를 따라야 한다.
찾아오신 이를 만나면 쉽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만나시려고 먼저 갈릴리에 와 계셨던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로워 졌다. 찾아가면 십자가요 무덤뿐인데 부활하신 분이 찾아오신 것이다. 씨가 흙을 찾아오듯이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오신다. 이 얼마나 새로워 진 일인가! 그러므로 새로운 눈으로 새것을 보고 찬양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분이 부활하여 하늘로 가 버리셨으면 누가 그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찾아오셨으니까 보았고, 문을 열고 들어오셨으니까 만났으며, 생선을 구워 놓고 “와서 먹으라.”고 하시니 먹고 알아보지 않았던가? 부활하신 주님은 언제 어떤 모양으로 찾아오실지 모른다. 그러나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은 늘 그를 기뻐하는 것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저지른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담당하시고 짊어지시고 하나로 묶어서 다 종결지으시고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부활의 세계로 인도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속이 되시려고 당신의 모습을, 당신의 그 찢긴 몸을 우리에 보여 주시고 우리 부활을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당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