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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2년 7월 29일
제목: Ⅲ. 율법과 그 계명들을 새롭게 하심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롬 3: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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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 요약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Ⅲ. 율법과 그 계명들을 새롭게 하심
1. 율법 아래 있는 인생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대신에 율법과 계명을 지키며 자기 행위로 살게 되었다.
율법이나 계명이나 도덕은 민족이나 종교에 따라 다르다. 그렇지만 크게는 양심과 도덕률, 신명과 계율로 나눌 수 있다. 이방인에게는 자기의 양심을 기초로 한 도덕률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신명(神命), 즉 하나님의 명령과 계율이 있다.
도덕률은 인간을 개선하자는 것이고 율법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자는 것이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인간을 바르게 하자는 것인데 형식만 따르면 도덕적으로는 외식(外飾)이 되고, 종교적으로는 우상숭배가 된다.
가. 인간은 자기 의를 위하여 율법과 도덕을 요구함
도덕이나 계율은 하나님이 있는 백성이든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이든 자기 스스로 필요해서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요구하셔도 받아들이는 자도 있고 거부하는 자도 있다. 인간은 왜 도덕과 율법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는가?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옳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생각되면 수용하지 않는다(출19:7~참).
나. 자신이 요청하고 존중하는 율법 아래서 신음함
1) 원함은 있으나 실행이 없음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우수한 민족이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율법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받았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런데 로마서 2장 23절에는 율법을 자랑하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고 하였다.
기독교인들도 같은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 모양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게 된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은 하는데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자랑하는 자가 오히려 그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 이것이 종교적 고민이며 갈등이다.
이런 고민과 갈등 속에서 인생은 일생동안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기독교처럼 회개를 많이 하는 종교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잘 안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모순과 갈등 속에서 사람들은 계속 양심에 채찍만을 가하고 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도덕이나 하나님의 계율을 버리면 야만이 되고 만다. 그래서 도덕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계율을 주장하는 것인데 그래서 더욱 더 모순과 갈등 속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문제다. 도덕률이 해이해지면 혼란에 빠지고, 도덕률이 지배하면 숨이 막히게 된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것이 이 문제다. 양심이나 도덕을 무시할 수도 없고 신명이나 계율을 버릴 수도 없다. 도덕률도 계율도 선악을 아는 입장에서 보면 다 옳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생을 괴롭게 한다는 것이다. 없애면 야만이 되고 지키자면 괴로운 것이다.
2) 자기 의를 세우려니 더욱 불의함
불의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같이 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묻지 않으시고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런데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대답하였다. 여호와는 다시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창3:7~11참)”하셨다. 즉, 벗은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고 하셨다는 것이다.
의복은 의를 상징한다. 아담은 자기 의(옷)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는 자기 의를 만들려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도덕이나 계율을 받아들여 옷을 입고 그 옷에 맞도록 실행하지 못해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다.
아무리 옳고 좋은 것이라도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것이라면 다른 대책이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의 대책
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
그 대책을 로마서 3장 21~22절에서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란 율법 안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대책이다.
이 대책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의롭다 함을 주시는 것이다. 그가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도덕이나 율법 아래서는 내가 그것을 행해서 의롭다 함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 함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다.
왜 그런가? 인간의 죄는 불의다. 피조물이 하나님같이 되었다는 것은 불의한 것이다. 이 불의가 해결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나.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행위로(스스로) 의롭다 함을 얻을 인간이 없는 줄 아시고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였다.(롬3:20~26참) 그의 의는 단순하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주시고 그를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 대신에 단순하게 진실한 한 사람을 보여 주시고 그가 참 사람이라고 믿고 헛되이 진실을 만들지 않으면 의롭다고 하시겠다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같이 되려는 인간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아담은 하나님같이 되려고 했으나 실패했지만 예수는 아담이 그렇게 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하나님같이’ 되신 분이다.(요11:27참) 그러나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하나님 같아지려는)를 처리하기 위해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죽으셨다.(요19:34,35, 롬8:3참) 그런데 하나님은 이 사람을 참 사람으로서 하나님 아들로 인정하신 것이다.
사람은 원래 예수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지음 받았다. 그런데 지식을 취하고 생명을 버림으로 자신의 목표였던 그 사람 예수를 버리고 자신의 길에서 빗나간 것이다. 지식을 취하면 자기 의를 만들려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도덕과 율법과 계율을 받아들이고 존중하고 보존한다. 그래서 가시밭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공급을 받음으로 영생을 누린다. 아담은 스스로 의로워지기 위해 지식을 취하고 선의 실천을 위해 도덕과 율법을 끌어들임으로 안과 밖으로 분열을 일으켰다. 그러나 예수는 생명으로 연합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
가) 구속 안에서 차별을 폐하심
인간의 의는 도덕적이고 율법적이므로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밖에 없는 인생의 위치를 회복하는 것이므로 차별이 없다. 인생의 위치는 하나뿐이다. 창조 안에서 하나이고 구속 안에서도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만유를 포함하는 죽으심을 통해 차별을 폐지하고 지성소, 즉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마 27:51, 히10:20참). 율법 안에서는 차별이 있으므로 아무나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누구든지 예수의 구속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로 가는 이 문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요14:6참). 그러므로 예수는 쉽고도 가벼운 분이시며 그를 믿기는 율법을 행하는 것보다 쉬운 것이다(마11:28참).
나) 죄와 율법에 매인 인간을 자유케 하셨음
죄는 거역과 분열을 가져왔으므로 그것을 제재하기 위해 율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를 통해 그 안에서 죄를 없이 하시고 자유를 주셨다(갈5:1,13참). 하나님의 의는 죄와 율법으로 얽매인 인생을 자유하게 한다.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같이 되려 하다가 스스로 율법의 올무에 얽매인 가련한 인생들에게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참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유일한 대책으로 하나님의 의이시다.
다) 사단을 정복하시고 율법과 계명을 새롭게 하심
동서고금의 많은 성인들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으나 만족한 결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이 문제의 근원에 사단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사단을 처리해야 한다.
(1) 인생으로서 사단을 정복하심
마태복음 4장 17절에는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란 사단과 전쟁을 하시고 승리하신 후라는 뜻이다. 즉 이 전쟁에 승리하신 때부터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이다.
이 전쟁은 인간이 하나님같이 되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의 위치를 지킬 것인가? 즉 사람이 하나님같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전쟁이다. 개가 소가 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모두가 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사단은 아담에게 사람이 선악을 알게 되면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고 했고 사람은 그 말을 믿고 그 지식을 취한 것이다.
그 결과 선악을 알고 그 지식으로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판단할 수 있게 되었으나 하나님과 같은 능력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알고도 행하지 못한 모순과 갈등에 빠지면서 어떻게 하든지 더 큰 능력을 얻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물질적이든 종교적이든, 혹은 정신적이든 영적이든, 더 큰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일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은 있으나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문제는 정욕이라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종교에서 이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문제가 마귀로부터 왔다고 믿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귀와의 전쟁에 나선 것이다(마4:1참). 문제가 다르기 때문에 해결의 차원도 다르다. 예수님은 단순하게 우리와 같은 사람,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는 인간으로서 전쟁에 나가셨고 이 사람으로서 사단을 물리치셨던 것이다.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하였고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하였다.
마귀는 다시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려 보라.” 하였고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다.” 하였다.
마귀는 또 다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고 내게 절하라. 내가 이것을 내가 원하는 자들에게 준다.” 하였고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싸움의 내용은 “인생아, 너는 능력도 없으면서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 된단 말이냐?”에 대하여 “그렇다 나는 인생이다. 인생이기 때문에 돌로 떡을 만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시험할 존재도 아니며, 천하만국의 영광을 받을 자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을 경배할 자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정상적 인간의 위치이며 태도인 것이다.
인간은 돌로 떡을 만들려고 능력의 천사에게 비굴했으며, 하나님을 시험하느라고 스스로 번민했고,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어 보려고 헛되이 분요했던 것이다.
인생의 문제는 너무도 많고 복잡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지으신 이와 피조물이 분별되니까 온 우주가 단순해진 것이다. 마귀는 하나님 같아지고 싶은 인생을 알고 계략으로 묶어 노예를 삼았지만 인생으로 그 지당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보고 물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자신이 인생임을 선언하면 마귀는 힘없이 물러나고 천사들이 수종하는 것이다(마4:11, 히1:1~참).
예수님이 능력으로 사단을 이기셨다면 우리도 각자 그런 능력으로 이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단을 이긴 무기는 단순하게 인생 그대로였다. 수양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인생’이면 사단을 이긴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이 사단을 이긴다.
‘나는 사람이다.’ 이 말은 권세가 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
이렇게 할 때도 “나는 사람이다. 피조물이다.”라고 대답하면 끝이다.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이다. 나는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 이 문제에 부딪혔으나 ‘나는 사람이다’라는 이 쉽고도 당연한 한 마디를 못해서 부끄러워하면서 수년 동안 헛된 길을 헤맸던 것이다.
세상에서도 이것을 알면 살기가 쉽다. “나는 사람이다.”라고 시인한다면 “ 나는 절대로 옳다” “나는 너와 다르다.”라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온 세상이 단순하고 조용해질 것이다. 세상은 서로 옳다는 것 때문에 시끄러운 것이다.
사람의 위치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다. 이 자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다. 힘써 지킬 필요도 없고 싸워서 얻을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것은 변치 않고 도적맞지 않는다. 이것이 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 있는 것이 안식인 것이다.
예수님은 바람을 잔잔케 하고 물 위를 걷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 능력으로 사단을 물리치지 않았다. 오직 인생의 위치만으로 승리하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지혜요 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멍에는 가볍고 쉽다. 다른 이들은 훌륭한 길을 제시했지만 인생에게 얼마나 무거운 짐을 주고 괴롭혔는가! 9년을 면벽해서 도를 얻고 참 사람이 된다면 인류 중에 몇이나 그 길을 감당하겠는가.
나도 젊었을 때 훌륭한 사역을 하는 사람이 되고자 힘을 썼던 일이 있었다. 그 때 나는 날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를 외우고 살다시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해방시켜 주셨다. 더 이상 쉽고 완전한 것은 없다. 나는 예수의 십자가 안에 있는 인생이다. 아멘.
(2) 하나님의 의로 새로워 짐
사단은 사람에게 하나님같이 되라고 선악을 아는 지식을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같이 되지 못한 사람을 종으로 삼은 것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판단할 수는 있으나 선을 행할 능력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스스로 불의한 자가 된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저희 눈 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하였다(롬3:11~18). 알면서 행하지 못하면 불의한 자가 되고 판단하고 살리지 못하면 저주가 되는 것이다.
사단은 사람에게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면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고 속였고 사람은 알고도 행하지 못하는 불의한 자가 되고 판단하고 살리지 못하는 잔인한 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하였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서 그분도 의로우시고 예수 믿는 사람도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셨다. 물위를 걷는 능력도,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능력도,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도 다 배제하셨다. 그리고 오로지 인간 그대로를 지키심으로 사단을 물리치고 구속을 이루셨다. 구속은 하나님이 나타내신 의로서 새로운 것이며 또 새롭게 하기 위한 기초이고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구속 받은 자들에게는 동산의 문이 열리고 성소의 휘장이 열린다.
(3) 옛것을 폐하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정체성을 폭로하셨다. 선악을 안다는 것으로 자고해졌던 인간이 심판 되고 그로 인하여 만들어졌던 모든 것이 심판 받았다. 바벨이 심판 받은 것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 안에서는 차별이 있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율법과 규례들 앞에서는 제도와 계급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십자가 앞에서 허물어졌다.
(가) 차별이 폐지됨
선악을 아는 지식 안에서는 인간도 천차만별이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더 나은 자와 못한 자, 높은 자와 낮은 자가 있다. 그러나 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 일반이 된다. 지식과 율법과 도덕으로 인하여 만들어졌던 모든 차별이 없어지게 된다(롬10:12참).
(나) 율법의 계명들이 회수됨
율법과 계명은 가능성이 있다는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구속이 왔으므로 그것들은 다시 하나님 앞으로 회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지킬 수 없는 사람에게 계명을 주지 않으신다. 십자가 안에서 인간의 정체성이 시인되면 율법은 회수되고 정죄는 없어진다. 법이 없으면 범함도 없으므로 정죄도 없어진다(롬4:15참).
(4) 새것을 가져오셨음
(가) 분위기가 새롭게 됨
① 진노의 분위기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구속을 이루시기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매우 험악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은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과 맞서서 자기 의를 내 세우고 있고 하나님은 그것을 정죄하고 진노하고 있으니 그 분위기는 험했던 것이다.
성전의 번제단에서는 날마다 죄 없는 어린양이 범죄한 인간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그 분위기는 피의 분위기요 진노와 형벌의 분위기였다. 언제나 긴장이 감돌고 곧 바로 진노의 저주가 내려올 것 같았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따른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보좌 앞으로 나아가려면 항상 죄 없는 양이 인간을 대신해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참담한 일이었던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인가? 아담 안에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지 않고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자기 의를 만들고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려면 인간의 정체성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진실한 자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라는 것도 하나님 앞에 진실해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 더욱 위선에 빠져 도리어 진실해질 수 없었기 때문에 번제단이 또 필요했던 것이다. 이 분위기는 법을 주신 이와 범법자가 맞서 있는 자리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구약의 분위기였다.
② 화해의 문이 열림
예수께서는 죽으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의로우시고 흠이 없는 분이었다. 번제단 없이도 하나님 앞에 이르실 수 있는 분이시다(마17:5참).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정체성을 드러내시고 은혜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의 휘장을 여셨다.
인간은 진실해졌고 하나님은 만족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인간을 다시 찾으셨고 인간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만난 것이다. 하늘이 청명해졌다. 진실과 진실이 만난 것이다. 거짓이 모두 사라졌다. 선악을 안다고 자고하던 거짓도 사라지고 불의를 보시고 진노하던 하나님의 모습도 사라졌다. 화목이 이루어진 것이다. 분위기가 완전하게 새로워 졌다(골1:20~22참).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진실하게 서야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선악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생명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나) 계약이 새로워 짐
① 율법을 통한 행위의 계약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계약이 있었다. 인간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내세우나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보장하는 법을 제정하고 상호간에 지키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것이 율법이다. 율법은 사람에게 주신 명령이기 전에 진실을 보장하는 정상적 관계를 위한 상호간의 계약이었다. 그런데 이 계약 안에서 선악을 안다는 인간은 더욱 거짓됨이 드러났고 하나님의 진노만을 더하게 한 것이다.
② 은혜를 통한 믿음의 계약
그런데 예수께서 인간의 정체성을 밝히셨으므로 대립적 관계는 사라지고 은혜의 관계가 정립되었다. 그러므로 법은 바뀌었다. 율법의 행위로 진실을 판단하던 법은 폐기되고 예수를 믿음으로 진실을 판단하게 되었다.
첫 번째 계약은 율법을 통한 행위의 계약이었다. 선악을 안다면 율법을 준행해야 한다는 것이고 인간은 이에 동의한 것이다(출19:8참). 그런데 그 행위로 의롭다고 할 육체가 없어서 법은 또 다시 규례들로 강화되었고 제사를 통해 심판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성전에서는 날마다 정죄와 심판이 집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계약은 예수를 진실하다고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인간의 정체성을 시인하고 믿는 자는 진실하다는 것이다. 아담, 즉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스스로 의롭게 되었다는 자를 믿고 따르면 거짓이고 십자가에서 죽고 인간의 참 모습을 나타내신 예수를 믿고 따르면 진실한 것이다.
그러니까 진실을 목적으로 제정된 모든 법은 “예수를 믿으면 의롭다 한다.” 는 법으로 함축되고 옛 법은 폐지된 것이다.
(다) 새것이 옴
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음
사단에게 속은 모든 인간은 십자가의 예수를 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참 사람으로 인정하셨다. 그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예수가 다시 사심으로 모든 것이 새로워 졌다.
전에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그에게 내려졌던 모든 것이 그대로 전가되었던 것이다.(롬5:15참)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 밝혀졌다. 그러므로 이 사실 안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의롭다 함을 받고 의의 옷을 입는다(롬5:18참).
②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함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 한 것처럼 한 사람 예수로 말미암아 의가 들어와서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한다(롬5장 참) 예수님께서는 아담이 부끄러워한 연약한 인생으로 사단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구속 받은 생명으로 사단과 죄를 이기고 왕 노릇 할 수 있게 되었다.
(라) 율법과 계명들이 새로워 졌음
율법은 정체성이 불완전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 같지 않은 체하는 자들에게 시험 문제로 내려진 것이다.(롬3:19참)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의 자리로 돌아오면 율법의 진노와 형벌은 회수되고 자녀에 대한 축복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다(롬4:7,8참).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으니까 사람에게 내려졌던 문제도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① 지성소에 들어가는 법이 새로워 졌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번제 단에서 제물을 잡아 그 피를 받고 나머지는 전부 불사른다. 대 제사장이 그 피를 가지고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 위에 그 피를 뿌리면 여호와는 그 피를 받으시고 백성의 죄를 사하시며 은혜를 베푸신다. 이것이 구약에 정해진 법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사는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하게 할 수 없어서 사실로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은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라 하였다(히9;10참).
② 제물이 새로워 졌음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은 자신과 교통하고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진실한 인격이다. 이 인격이 아담으로 인하여 없어졌기 때문에 그 인격을 대신하여 한 상징으로서 동물을 제물로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인격이 나올 때까지 동물로 드리는 제사는 그나마 계속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제물로서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당연히 제사의 법은 새로워 진 것이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는 예수 안에서 그 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도 산 길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진실을 요구 하신다. 그러면 무엇이 진실인가? 육신의 생명(진실)은 피에 있고 영혼의 생명(진실)은 구속 받은 인격에 있다. 그래서 율법은 번제단의 피를 가지고서야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진실(피)을 나타내시고 그 진실로 하나님을 대면하시고 만민을 구속하셨다. 하나님은 만족하셨고 인간은 구속되어 제 자리로 돌아 왔다.(마27:51, 히10:20참)
모든 것이 새로워 졌다. 휘장이 열렸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법이 새로워 졌다. 율법과 계명들이 새로워졌고 하나님 표정도 새로워지셨다. 요한계시록 22장 3~4절에는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하였다. 하나님 표정이 얼마나 다정해졌으면 모세도 보지 못했던 그 얼굴을 볼 수 있단 말인가!
행위로는 하나님을 뵈올 수 없지만 구속 받은 인격으로는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세계가 열렸다. 창조도 하나님이 해 놓으셨고 구속도 그분이 해 놓으셨다. 우리가 새롭게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미 새롭게 해 놓으셨다. 계명도, 율법도 새로워 졌고 하나님의 얼굴 표정까지도 새로워 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율법과 계명의 멍에를 벗겨 주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해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얼굴 표정까지도 바꾸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로지 주님이 하신 일만 보게 해 주시기를 원하고 주님께서 이루신 일에 동참하고 이루신 일을 감사하고 찬양하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