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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5년7월29일
제목: 대표 인간
설교자: 김치현 목사
본문: 롬5:12-14 -
성경 본문
12.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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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1. 대표 인간
(롬5:12-14)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으나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니라.”
‘완전한 구원’이라는 주제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첫 번째, 모든 사람을 ‘대표 인간’ 안에 포함시키셨다는 말씀을 하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언제 어디에 살았다고 설명하긴 어렵지만, 모든 사람의 대표로서 실재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의 일화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대표 인간’이라고 부른다. ‘첫 사람 아담’(고전15:45)이라는 말은 아담 그 이후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는 말이다. 성경 말씀이 내 얘기로 들리고 나로 알아질 때 나를 움직이는 살아 있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가. 원죄
아담이 지은 죄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가되었는가?
아담이 잘못한 것을 우리가 뒤집어썼다기보다 개인의 경험 이전에 이미 우리에게 있는 문제를 근원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은 일은 과거 아담이라는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기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판단과 미움과 원망과 시비 등 모든 부정적인 현상들의 총체적인 이유를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 행위 이전의 문제
아담이 한 일, 가인이 한 일, 바벨탑을 쌓던 일이 내가 한 일로 보여야 ‘내가 죄인이었구나!’ 라고 고백하게 된다. 보통 사람은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자기가 그런 사람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사람이 만든 법은 동기를 심판하지는 못하고 행위로 나타나진 것만 심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아시고 그 생명을 보시기에 꼭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아도 위치를 이탈했음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예수님도 미워함과 음욕을 품은 내적 동기는 살인과 간음을 한 행위와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가인이 제사를 드렸을 때 여호와께서 받지 않으셨다. 왜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 설명이 없다. 그런데 제사를 받지 않으셨고 가인이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왜 분하냐? 왜 안색이 변하냐?”라고 반문하셨다. 합당한 자리에 있다면 왜 분이 나겠느냐 라고 묻는 것이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라고 고백한다면 왜 안색이 변하겠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은 가인이 무엇을 하기 전에 이미 가인을 아셨다.
다. 하나님의 선택
가인과 아벨, 노아와 네피림, 아브라함과 롯, 에서와 야곱 등 상반되는 두 사람은 우리 안에 있는 두 성질을 보여 준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롬9:13).” 하심 같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선택하셨다. 당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어떤 성질을 취하시는 것이다. 나라가 되기 위하여 연합될 수 있는 성질을 취하시고,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기 영광이 없는 사람, 자기 의와 자랑과 변명이 없고 자신에 대해서는 할 말 없는 자들을 취하셨다.
내가 에서에 가까운 사람인지 야곱에 가까운 사람인지 생각하지만, 에서 같은 면도 야곱 같은 면도 다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에서 같은 면을 높이 평가하고 야곱 같은 면을 미워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보고, 누가 참으로 영광스러운 사람인지를 알게 되면 우리 안에서 그것이 강화되는 것이다. 사람이 선택하는 물건이 귀한 것으로 여겨지듯, 하나님의 선택이 우리에게는 영광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야곱을 건져서 에서를 그 구원에 포함시키려는 것이다.
라. 최종적 선택이신 예수 안에서
‘피조물에게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나타날 때’ 그것을 ‘영광’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구조적으로 사람에게서 참된 영광이 나타나기 전까지 무엇을 해도 허무하고 무엇을 해도 만족이 없다. 그래서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19-21)."
하나님의 최종적 선택은 예수 안에 있다. 우리는 최종적 선택이신 예수 안에서 동일시됨으로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된다. 사람의 최종적 갈망은 영광에 있다. 사람이 육신의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부끄러움과 수치이다. 선악과를 먹은 후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워 치마를 해 입었다는 것은 수치가 가장 문제되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영광이 따른다면 고통은 견딜 수 있게 된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사람에게 있어야 할 것은 영광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 후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의 표현이다. 영광은 어떠한 고통도 보상이 된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6-7).”
제자들도 예수의 영광을 보고 따랐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영광이 아니었기에 십자가 앞에서 모두 예수를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버린 예수에게서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신 영광을 보고 인생이 뒤집혀서 예수의 증인이 되었다.
아담의 눈에 보암직하지 않아 버렸던 것, 제자들이 실망하고 버렸던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보이면 사람은 재창조되고 거듭나게 된다. 내가 싫어하고 무시하던 사람에게서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사람은 뒤집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무시되었던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안에 있었던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인류의 미래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고 그 앞에 절하고 입맞출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를 따를 것인가에 달려 있다. 아담 안에서 발견되어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암직하게 여겼던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게 하셔서 함께 죽고 함께 살아 영광의 보좌에 함께 앉히시는 것이 영광의 부르심이다. 함께 포함되는 것의 최종 목표는 함께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3-4)."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하리라(계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