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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5년7월30일
제목: 3.하나님의 섭리
설교자: 김치현 목사
본문: 창50:20 -
성경 본문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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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2. 하나님의 섭리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두 번째 말씀은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보지 말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나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완전한 구원이 되자면 하나님이 우리의 어떤 것이라도 선으로 바꾸셔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사람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했는가 보다 내 인생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나를 보는 것이다.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들을 볼 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나셨나 봐야 하는 것이다.
탕자의 이야기는 탕자가 어떻게 살았는가 보다 삶이 어떠했든지 돌아오는 아들을 달려 나가 맞으며 채색 옷을 입히고 살찐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의 마음에 촛점이 있다. 방탕하고 실패한 아들에게 아버지의 긍휼과 사랑이 나타난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약한 민족이었기에 땅에서 인간이 겪어야할 모든 문제들에 노출된 백성이었다. 약한 민족이 땅에서 겪는 모든 문제들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골골이 수놓아져 있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가장 작은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탕자에게 아버지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나듯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의가 가장 명백하게 드러났다.
가. 자유의지
사람은 자기 의를 가지려 한다. 자기 의를 세움으로써 존재감을 가지게 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헤아리고 판단하게 된다. 자기 의가 없으면 사람은 누구도 정죄할 수 없게 된다. 간음한 여인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죄 없는 자는 돌로 쳐라."고 하신 것은 속에 있는 동기까지도 드러내셔서 자기 의를 무너뜨리신 것이다.
자기 의를 가지자면 의지와 노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의지를 발휘해 노력해서 얻은 성취에는 어쩔 수 없이 내 의가 묻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잘한 일은 그 속에 내 의지가 들었다고 내세우고 싶지만, 잘못한 결과에 대해서는 의지를 빼고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려 한다. 자유의지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칭찬 듣고 싶은 것도 의지이고 비난 받는 것도 그 사람의 의지이다. 의지만 빼버리면 잘했다 할 일도 못했다 할 일도 없다. 구약성경에도 부지중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도피성에 들어가 형벌을 피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의지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는 더 큰 의지를 만나면 속박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 의지'가 없다. 마틴 루터는 이것을 '노예 의지'라고 했다. 나보다 더 간교한 자가 속이려 들면 속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기에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긍휼을 거두시지 않는 것이다.
나. 하나님의 열심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의 쌍방계약이었다. 신명기 28장은 "네가 순종하면 이런 복을 받고, 네가 거역하면 이런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율법 안에서는 우리의 순종의 의지가 중요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한 시대도 율법을 온전히 지킨 시대가 없었다. 성경은 이것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고 죄를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율법으로 인간의 죄가 드러났을 때 하나님은 새로운 약속을 주셔서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 속에 기록하겠다."고 하셨다. 돌 판에 새긴 말씀을 사람의 심비에 새기겠다는 말씀이다. 율법이 쌍방계약이라면 새 언약은 일방계약이다. 새 언약에는 하나님의 의지만 있고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이란 조건이 없다. 그러므로 복음에는 사람의 의가 없고 하나님의 의만 나타나는 것이다(롬1:16).
다. 하나님의 섭리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려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선악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의 판단은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었고, 선악의 판단을 가질수록 정죄와 다툼과 분열만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인간이 규정한 선과 악은 의미가 없고 하나님의 의만 나타난다.
인간의 모든 판단을 끝내게 하는 말씀이 창세기의 백미와도 같은 요셉의 최종 고백이다. “당신들은 나를 헤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동생을 시기하여 죽이려했던 집안의 어두운 역사까지도 하나님은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셨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하나님은 적재적소에 쓰시는 분이시다(롬8:28).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하나님은 그 하시는 일을 시종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 우리의 짧은 소견으로 판단해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 섭리하심 안에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고 고백하게 될 때 삶은 온전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 사람, 그의 섭리를 보게 된 사람은 자기 판단을 고집할 수 없고, 자기를 변명할 수도 변명할 필요도 없으며, 자기 자랑과 자기 의를 내세울 수 없다.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게 된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날 때 사람은 온전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