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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3년 6월 16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생명의 건축을 위한 부활(6)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20:30-31 -
성경 본문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생명의 건축을 위한 부활
요20:1~21:25
맺는 말 (생명을 얻게 하려 함)
요20:30,31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함(요20:30,31)이라고 했다. 영생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아담은 생명나무 열매 대신에 선악을 아는 지식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이 생명을 잃고 정녕 죽으리라 한 대로 사망에 빠졌다. 그러므로 아담은 사망 안에 있는 육체다.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인 것이다(계3:1). 영생이 없으므로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없고 그 나라가 없는 자다. 요한은 이런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려고 이 글을 썼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영원한 말씀이 육체 안에서 인격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의 과정을 통해 생명주는 영이 되어 다시 제자들 안으로 왔다고 증거한다. 인격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신 주님은 생명주는 영이 되어(고전15:45) 우리의 삶이 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돌비에 새긴 말씀이 성소에 있어서 인간을 인도하는 경전이 되었으나 주님이 오심으로 그 말씀은 육체 안에서 인격이 되심으로 육체인 우리와 함께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항상 객관적이어서 말씀과 나는 따로따로인 것이다. 즉 내 생명 안에는 그 말씀이 없고 생명 밖에 있으므로 갈등을 일으켜 오히려 사망이 되게 하는 것이다.(롬7:24참)
그러나 이제 복음이 왔다. 영원하신 그 말씀이 우리 생명이 될 수 있도록 과정을 거쳐 다시 오신 것이다. 밥이 내 육체가 되기 위해서 소화흡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영원하신 말씀도 과정을 거쳤다.
말씀이 네 입에 있어서 심히 가깝다고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화시킬 수 없는 양식이어서 그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렸던 것이다(암8:11참). 생물은 먹을 것을 먹지 못하면 다른 것을 먹게 되고 다른 것을 먹게 되면 왜곡되고 병들어 죽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을 먹지 못하면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하게 되는 것이다.( 롬5:21,6:12)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받고도 그것을 소화시키지 못해서 왜곡시키고 종래에는 도리어 멸망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양식이라도 소화시키지 못하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와 함께 한다고 한 것은 소화될 수 있도록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장막이 백성 중에 있었던 것보다는 훨씬 가까워진 것이지만 역시 완전하게 소화흡수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는 성육신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 머물고 있는 경우 자기에게는 그 생명이 없기 때문에 구약의 범위를 크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건조된 장막이 인격화한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객관적이므로 따로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간의 문제는 거리가 너무 멀고 성질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요한은 이 복음서를 마무리하면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표적들도 있었으나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표적들을 선별했다" 고 했는데 그 절정을 이루는 것이 십자가에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여 숨을 불어넣어 주심인 것이다. 죽으심은 구속을 위함이고 숨을 불어넣으신 것은 새 생명을 위함이다(창2:7참).
예수께서 숨을 내쉬신 것은 불어넣어 생명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숨이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생명이 될 수 있는가?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당하게 된다.
잠간 숨이 멈춘 사람은 코에 숨을 불어넣으면 다시 숨을 쉬고 살아난다. 그러나 예수께서 숨을 불어넣으신다고 해서 성령이 사람 속에 들어가서 생명이 되겠느냐는 것이다(창2:7대).
요한은 이 마지막 말씀으로 이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이고, 그의 아들이란 누구이며, 또 그리스도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이란 전능자를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황제를 하나님 혹은 하나님 아들이라 불렀다(단5:22참). 그런데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자기들을 애굽에서 구속하여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정착하게 한 그 전능하신 분을 여호와 하나님이라 불렀다.
'하나님 아들'에 대해서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동의어로 사용했으나 유대인들은 천사들을 일컬었으며(창6:2,욥1:6,2:1참) 때로는 이방인의 왕을(단5:22참)지칭하기도 하였다. 역시 전능자라는 의미다.
그리스도란 전능자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백성의 구원을 위임 받은 자라는 것이다. 역시 전능자의 대리자라는 뜻이다.
그런즉 종합하면 예수를 전능자 혹은 그의 아들로서 구원을 위해 오신 분으로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1요4:15대). 요한은 다시 그의 서신에서 이 문제를 제시하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한다(1요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 세상을 이긴다. 당연히 그렇다.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믿으면 영생을 얻고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예수는 누군가?
천사는 영이므로 하나님과 모양(?)이 같고 능력은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다(히7:3). 아담이 부러워하는 대상이다. 아담이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가진 자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보여진 예수는 볼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우리(아담)가 다 버린 자다(사53장 참).
그러나 진실하여 흠이 없고 순종하여 온전하다. 진실과 충신이다(계11:19).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위임하기에 적합한 참사람이다. 씨를 뿌리려는 농부에게 옥토와 같다. 가장 비천하지만 주님의 위임은 그를 가장 영광스럽게 했다. 흙은 가장 비천하다. 그러나 씨 뿌림에 따라서 그 고귀함은 헤아릴 수가 없게 된다.
그는 잠깐 동안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된 자 같았다. 그러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히1:2:9).
나는 예수 안에 있는 인격을 보고 천사를 부러워하던 모든 것을 버렸으며, 거룩한 위임을 보고 나의 일을 버렸다. 아니, 버리기도 전에 모두 떠나가 버린 것이다.
그 인격이란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 위치이며, 위임이란 그분의 나라를 위해 부르신 것이다. 천사를 부러워하면 인격을 버리게 되고, 세상을 부러워하게 되면 거룩한 위임을 버리게 된다.
나에게는 천사와 같은 능력이 없지만 예수 안에서 내게 정해주신 위치가 진실하기에 평안하고, 그의 나라를 위해 불러주심이 감사해서 범사에 만족하다.
내가 믿고 섬기며 사랑하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하여 가장 큰 자요 전능자라고 믿어진다면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요 참 삶이다. 예수님은 이 생명을 주시려고 세상에 대하여 죽으시고 하나님에 대하여 다시 사신 그 영을 제자들에게 불어 넣으셨다.
아담은 천사가 부러워서 선악과를 먹고 사망에 빠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정해주신 인격에 만족하여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아들이 되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라는 칭송을 받으셨다(1요5:20).
마귀와 싸워 이기시고 영생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천사보다 아름다운 인격을 보여 주셨고, 그의 영광보다 빛나는 위임을 보여 주셨으며, 지고 이기시며, 죽고 다시 사는 새 생명을 보여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