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2013년 6월 30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맺는말(3)생명의 건축을 위임하기 위하여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21:15-24 -
성경 본문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21: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1: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생명의 건축을 위한 부활
요20:1~21:25
맺는 말(3) 요21:15~24
3.생명의 건축을 위임하기 위하여
밤이 다하도록 수고는 했으나 고기를 잡지 못해 굶주리는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이신 후에 주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언제나 다른 제자들보다 앞장서서 주님을 증거하고 또 맹세했던 사람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했고,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마26:33) 했으며, 또한 “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 데도 함께 하겠습니다”(눅22:33)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했고,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 맨 먼저 달려갔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나 그가 사라지자 바로 고기 잡으러 가는 데 앞장을 섰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제자들에게도 함께 묻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주님의 위임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a. 사랑하는 사람에게 위임하기 위하여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주님의 일을 위임받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어떤 확고한 관계가 성립되어야 했던 것이다. 주님의 일은 땅 위에 주님의 생명으로 그 몸된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다.
조직이나 제도를 맡기기 위해서도 확실한 관계가 필요하다, 하물며 생명을 맡기는 일이랴! 주님의 위임은 생명의 위임이다. 주님은 생명을 주려고 오셨고 (요10:10,28))그 생명으로 그 몸을 건축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위임을 하셔야 했던 것이다.
사랑을 확인하심
그러므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거듭 물으셨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세번째 또 물으셨을 때는 근심하는 중에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고 대답하였다.
주님은 왜 세 번이나 거듭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가?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다. 세 번은 확정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확실하게 부인했기 때문에 확실하게 사랑을 고백해야 했던 것이다. 주님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다.
먹이는 것은 양식을 주는 것이며 치는 것(shepher)은 양떼를 인도하는 것이고, 인도의 목표는 건축하는 것이다. 먹이는 것과 기르는 것은 좀 다른 문제일 수 있다. 먹이는 것이 생리적이라면 기르는 것은 사랑의 문제다.
아기를 낳으면 생리적으로 젖이 나온다. 그러면 생리적인 양육이 가능하다. 그러나 기르는 것은 사랑의 돌봄이기에 의지적이다. 낳는 것은 여자이면 누구나 가능하다 그러나 기르는 것은 여자라고 다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랑이 필요하다. 주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양들을 먹이고 칠 것을 위임하셨다.
주님의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이 일은 생명과 사랑(자기희생)이 필요하다.
첫째는 다시 난 생명(영생)이라야 한다.
천연적인 생명으로는 다시 난 생명을 낳을 수 없고 기를 수 없다. 개의 생명으로 소를 낳을 수 없고 기를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은 원래 생기를 받았을 뿐 아직 영생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사단으로부터 선악을 아는 지식만 받았다. 그러므로 이 생명으로는 주님의 일을 위임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민을 하나님의 집의 건축 안으로 부르시기 위해 생명을 주려고 아들을 보내셨다(요10:10). 그러므로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 새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다.(롬6:8) 영생은 타고 난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며, 이 생명으로 주님의 위임을 받는다.
둘째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함
먹일 뿐 아니라 기르려면 사랑이 필요하고 사랑하려면 자기희생이 따라야 한다(고전13장참).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에서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아들을 주심에서 나타났다(요3:16). 엄마가 아기를 낳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기르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자기희생을 수반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을 주는 것이며 그 안에서 죽는 것이다. 주님은 아가파오(agapao)하느냐로 물으셨고 베드로는 필리오(philio) 합니다로 대답했다. 둘 다 사랑한다는 말이지만 전자는 자기희생이 더 강하게 내포된 것 같다.(사전적인 의미로는 필리오보다는 아가파오가 더 깊은 의미가 있으나 바꿔 쓰는 경우도 있음. 요5:20,딛3:15참)
주님은 내가 너를 사랑(아가파오)하는 것처럼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셨으나 베드로는 내가 어찌 주님의 사랑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것으로 대답한 것 같다. 베드로는 남다르게 주님을 사랑하고 싶었으나 철저하게 실패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완전한 실패자였다.
베드로는 남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고 싶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와 너무 다른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외모는 같지만 오고 가는 길이 너무 다른 사람을 만난 것이다. 베드로가 아닌 다른 누가 그런 사람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베드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며 오히려 주님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의 대표격인 사람이다.
일심동체가 되어야 함
그러나 아담으로서 그리스도를 만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시 나야 하고 길들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야생마가 말 길들이는 사람을 만나면 하는 것마다 실패가 되는 것이다. 그놈은 많은 실패를 하고 난 다음에 주인과 일심동체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을 만나 실패한 사람은 참으로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주인의 사람이 되어야 함
우리는 모두 선악과를 먹은 아담 안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주인 없는 야생마처럼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붙잡혀 길들여져야 한다. 쓸모 있는 말이 되기 위해서는 주인에게 붙잡혀 실패를 거듭하면서 다루어져야 한다. 베드로는 맹세와 배신의 과정을 거치면서 공과를 배웠던 것이다.
주님에게는 자신의 일을 위임하기 위해서 사랑이 넘치는 베드로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공과를 거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실패를 거치면서 주님과 일심동체가 되었고 주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가파오 하느냐고 물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