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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3년 7월 21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맺는말(6)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은 끝이 없음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21:25 -
성경 본문
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생명의 건축을 위한 부활
요20:1~21:25
맺는 말(6) (요21:25)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은 끝이 없음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20장까지 다 기록하고 또 부가해서 21장을 기록하고도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하였다.
삼년 반에 불과한 예수의 생애에서 그 행적이 얼마나 많다고 이런 말을 했을까? 시공간 안에서 일어난 역사는 시공간이 제한된 것처럼 아무리 길어도 한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의 행하신 일은 끝이 없어서 다 기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는 시공과 함께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진리는 영원하고 그 실제는 계속되는 것이다. 창조는 제한되었으나 창조적 실제는 계속되고, 타락은 제한되었으나 그 실제는 계속되는 것이다. 바벨은 제한되었으나 계시록의 때까지 계속되고, 역사적 출애급은 제한되었으나 출애굽적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인 예수사건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 사건은 사도들의 행전을 통해서 계속되었고 지금은 우리를 통해서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의 복음서가 다른 복음서들과 차별화된 것은 공관복음이 역사적 예수를 서술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요한은 실제적 예수를 증거하는데 목적을 두었다는 것이다. 시공간적 사건 뒤에 있는 영적인 계시를 증거하려는 것이 요한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이 증거한 예수 사건은 그 이면에 있는 어떤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진리의 증거자로서 예수의 증인이었다. “내가 올 때까지 머물게 할지라도...”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도 의미있는 말씀이었다. 요한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지금도 주님을 증거하고 있는 사람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한두 번 보면 다 알 수 있다. 더 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사진과 그림은 다르다. 사신은 렌즈에 비친 것을 복사한 것이니까 백번을 찍어도 동일하다. 그러나 그림은 그리는 사람 생각 속에 비친 영상을 그 사람의 생각과 솜씨에 따라 그린 것이기 때문에 그린 사람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요한은 자기 영안에 비친 주님과 그가 행하신 일들을 그의 경험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전한 모든 기록들은 단순한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라 뜻을 증거하기 위한 기록들이다.
공관복음이라고 이름 붙여진 책은 세 사람이 같은 사건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사건은 여러 사람이 같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뜻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요한은 사건이 아니라 뜻을 보고 그 뜻을 증거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표면적 사건이 아니라 이면적인 의미다. 예를 들면 천국은 밭에 묻힌 보화를 발견한 사람같다고 했을 때 그것은 발견한 사람의 마음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어떤 모양이라고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진기로는 찍을 수가 없고 녹음기로는 녹음할 수 없는 것이다. 말씀은 기계와 관계되지 않고 인격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말씀은 육신의 기능으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주님은 많은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의 뜻을 알아듣고 그를 따르는 사람은 소수였다. 예수께서 영생하는 양식을 주겠다고 했을 때 표면적으로 들은 사람들은 먹으면 죽지 않는 양식을 달라고 좇아 왔고, 왜곡해게 들은 사람들은 네가 모세보다 크냐고 비웃었던 것이다.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직접 자기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그가 행하신 일들을 보았으며, 그가 하신 말씀들을 들었다. 그러나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핍박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이천 년이 지난 옛 이야기를 책에 기록해 놓은 대로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에 기록된 것을 보고 “네가 안다, 내가 안다” 하고 싸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교리서를 만들고 전통을 만들어서 그것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결과는 분열과 독선만을 낳게 되었고 성령이 자기에게 특별하게 보여 주어서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과는 혼란만을 일으켰던 것이다.
하여간에 기록된 성경이 표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성경이 직접 모든 것, 즉 이면에 있는 모든 것까지 다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사전도 아니고 교과서도 아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만난 증거다. 그러므로 이 증거는 우리가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오히려 그를 믿고 살아내는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 증거될 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다 증거하지 못한 말은 남겨 두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교리로 확정하면 더 이상 증거가 나오지 않고 신학으로 주장하면 분열만 일어난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다(계19:10). 그의 육체에 관해서는 보기도 하고 만지기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영은 대언자를 통해서 증거되었다. 하나님은 만난 사람들에 의해서 증거되었고, 그의 말씀 또한 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대언되었다. 하나님이 직접 성경이라는 책을 찍어 내려 보내 주신 것이 아니다.
성경은 증인들의 증거이고 교회의 증거다. 그러므로 증인이 있고 교회가 있다면 그에 관한 증거는 그가 온 세상에 나타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요한의 기록은 태초부터 있는 말씀의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