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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4년 1월 19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생수의 표적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7:37-44, 계22:1 -
성경 본문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7: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7: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7:43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7: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생수의 표적 (요7:37~44, 계22:1참)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께서는 명절 마지막에 사람들에게 외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셨다.
이 명절은 초막절(장막절)로서, 유월절·오순절과 더불어 유대인의 삼대 명절 중 하나인데 일곱 번째 달 15일, 즉 10월 15일이며, 이 명절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고 특수한 의식을 행한다.
역사적 의미
명절 기간 동안에는 어느 곳에서나 초막을 짓고 기거하는데 나뭇가지와 잎으로 외벽을 가리고 천정은 듬성듬성 걸쳐서 밤이면 달과 별들이 보이도록 한다. 이것은 광야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에 지붕 없는 초막집에서 지내던 것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레23:40~43).
농업적 의미
장막절이라고도 부르는 이 절기는 일 년 농사의 수확물을 거두어 저장한다고 해서 수장절이라고도 하며, 명절 중 가장 성대하게 지냄으로써 다 함께 기쁨을 나눈다고 한다.
특수한 예식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종려나무 가지, 버들가지 같은 아름다운 가지들을 가지고 제단의 주위를 행진하면서“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리라"(사12:3)는 노래를 부른다. 그 때 한 제사장은 실로암 연못에 가서 6홉들이 금 주전자에 물을 담아다가 제물 위에 붓고 이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레위인들은 시113~118편을 피리반주에 맞추어 부른다. 그리고 “여호와께 감사하라”,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18:1,25,29) 하면, 경배하는 자들은 제단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고 종려가지를 흔든다는 것이다.
이 의식을 행한 후에는 물을 주시고 비를 주시며 광야를 지날 때 반석에서 생수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고, 마지막으로는 여리고성 사건을 상기하고 재현하기 위해 제단을 일곱 번 돎으로써 막을 내린다고 한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하신 것이다.
이 날은 명절 끝날이었음
거창하고 성대한 절기는 끝이 나게 되었다. 초막절은 명절들 중에 가장 성대하게 지내는 절기였다. 수확물을 거두어 저장하는 절기이므로 모든 것이 풍족했다. 모두들 마음으로 흥분하고 기뻐했다.
그러나 명절은 끝나가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축제의 기분은 가라앉고, 사람들은 다시 메마른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이었다.
육체의 70% 이상이 물로 된 생물로서의 인간에게는 물과 곡식은 생명을 위한 절대 조건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그것들로는 다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의 우물이 필요하고, 반석의 생수가 필요했다. 사막을 통행해야 했던 이스라엘에게 우물과 생수는 생명과 직결된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물에 관한 그들의 관념은 생명의 다양한 필요와 관계되었다(계22:1참).
예수는 생명의 물
절기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성대했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표면적인 필요를 어느 정도 채울 수 있다. 그러나 존재를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다. 다 목이 말라있었다.
그러므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신 것은 깊은 곳,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 안에 생수가 흘러나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었지만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었고 그의 기름부음 안에 있었기에 자신의 깊은 곳, 즉 그 존재 안에 생수의 흘러남이 있었다. 그 흘러나옴은 깊은 우물 같았고 반석에서 솟아난 생수와 같았다. 인생의 빈자리를 채우기에 적합하고 넉넉한 것이었다.
생명은 믿고 먹음으로 삶
이러한 자신을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수처럼 마시게 하고 싶었고(37), 그 영을 호흡처럼 불어넣고 싶어하셨다(20:22참). 그러나 믿지 못하고 먹지 못함으로 그를 받을 수가 없었다. 왜 믿지 못하고 먹지 못하는가? 요한은 “그가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담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한 것은 그것이 선악과만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종교와 문화와 천사의 능력만큼 먹음직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혹은 선지자라 하고, 혹은 그리스도라고도 하였으나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는 다윗의 씨로 베들레헴에서(마2:5,6.미5:2인) 나오리라 하지 않았느냐 하면서 논쟁하는 자도 있었던 것이다.
생명을 두고 논쟁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인간은 믿는 대로 살며, 먹는 대로 사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믿은 만큼 사는 것이며, 먹으면 먹은 만큼 살게 된다(6:57참). 생명은 이해를 위한 논쟁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며 먹는 생활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으시고, 믿게 하고 먹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표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으나 사람들은 믿지 못하고 먹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영광 받으신 것을 보면 믿게 되며 자신의 배, 즉 존재의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된다.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셨다. 진실과 충신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써 아담 이후 최초로 참 사람을 회복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셨다. 요한은 자신도 그 때에는 믿지 못했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을 보고 그를 믿었고 먹었으며 살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길잡이가 되려고 이 말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그는 예수를 받고 난 전 인생이 그가 말씀하셨던 대로 자신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되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려고 이 글을 썼던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그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생은 예수를 생명나무 열매로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물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생명을 위해 흘러나오는 생수의 표적이시다(고전10:4,계22:1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