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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4년 2월 9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그리스도의 표적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고전1:22-24 -
성경 본문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그리스도의 표적 (고전1:22~24)
요한이 복음서를 쓰게 된 것은 유대에서 시작된 복음이 헬라세계로 퍼지면서 당면하게 된 문제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대인의 관심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킬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었고, 헬라인의 관심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 진리를 찾는 것이었다.
이 글을 쓸 때는 주후 100년경이었고 요한의 나이 90이 넘은 때였다. 유대인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교회가 소아시아 전 지역에 확산되었는데 교회 구성원의 비율에 있어서 희랍인의 수가 월등하게 많아진 상황이었다.
그래서 유대인의 민족 종교적 관심과 역사적 필요 안에서 전파되고 받아들여졌던 복음이 희랍인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는 곤란한 점이 너무 많아졌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구원할 메시야가 누구이며 그가 언제 오는가라는 단순한 문제를 가지고 복음에 접근하였기에 예수라는 사람이 메시아인지 아닌지만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메시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처형해버린 것이다.
그에 비하여 희랍인들은 인생과 우주에 대하여 철학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었기에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고, 예수가 참 지혜자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이다.
요한은 이와 같은 당면한 문제에 직면하여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 끝에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대하여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메시아
유대인들의 구체적인 민족사는 출애굽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야곱 족속 70인이 양식을 따라 애굽에 내려갔다가 바로에게 노예가 되어 400년을 지낸 후,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모세에 의해 구원을 받은 백성이다.
그러므로 고난이 닥쳐오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고대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름부음 받은 종을 보내신다는 믿음이다. 이것이 그들의 메시야 사상이다. 그러므로 국권을 상실한 그들에게는 예수가 메시야인가만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예수는 그들이 기대하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함이 아니었다(행1:6참). 모세는 바로에게 종이 된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예수는 사단에게 노예가 된 인류를 구속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바로의 노예이던 상태에서 해방되었으나 사단에게서는 완전하게 해방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나라는 얼마 가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다. 바로에게 노예된 것은 사단에게 노예 된 것에 대한 표적이었을 뿐이었다.
이스라엘의 적이 바로였다면 인류의 적은 사단이다. 바로는 이스라엘의 민족국가를 방해하는 자였지만 사단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자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목적은 인류를 사단의 손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예정된 그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재판정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셨고, 빌라도의 질문에는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오신 것이지, 인간들이 바라는 나라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오신 메시아로서, 지금은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전파하시고, 장차는 새 예루살렘에서 어린양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생명수가 흐르는 통치를 이루실 것이다.
헬라인들에게 로고스가 육체가 되신 분(요1:1~)
희랍인들에게 로고스는 우주적 이성이며 최고의 이성으로서 우주와 인생을 좌우하는 정신이다. 그들은 인간을 움직인 것이 이성인 것과 같이 이 우주도 우주 자신의 이성이 좌우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성은 비인격적이었기에 사람과는 무관한 어떤 원리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성이 육체가 되어 우리 중에 왔는데 그가 온 것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을 영접하면 그 이성과 인격적으로 함께 함으로써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은혜는 인격을 완성하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며, 진리는 그들이 완전하게 살고자 하는 최고 지혜의 원천인 것이다.
또한 완전함에 도달하려고 지혜를 찾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는 절대자에게 도달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였다(요14:6). 이런 말들은 희랍인들에게는 알아들을 만한 용어이기는 했겠지만 과연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다.
다만 그 후에 전파된 기독교를 보면 요한이 의도했던 것과 같은 예수가 전파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복음이 희랍사상을 흡수했는지 아니면 오히려 흡수당했는지, 기독교의 역사는 많은 문제를 남기고 있다.
예수는 누구인가?
유대인들에게는 많은 표적들을 제시하심으로써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했으나 그들이 믿지 않았고, 결국 자칭 하나님이라 하여 하나님을 모독하고 안식일을 범하고 성전을 멸시한 자라고 하여 사형에 처한 것이다.
또한 희랍인들에게는 말씀이 육체가 되신 분으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절대자에게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전파하였지만 그들의 사상적인 기질대로 종교적으로 예수를 미화시킴으로써 숭배하게 하였고, 교리화시킴으로서 생명을 굳어지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혼란케 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유대주의로 돌아간 사람들이나 희랍의 이원론으로 혼합된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그의 계시록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어린양 예수를 계시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모두 인류를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메시야를 제시하고 있다.
예수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임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같이 되어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행하게 하고 인류를 자기의 조종 하에 두고 있는 사단을 멸하고, 그에게 노예가 된 인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계획하신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어린양-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다.
새 인류를 위한 구원하기 위해서는 죽고 다시 산 사람이 필요하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된 인간은 가르처서 되지 않고 깨닫게 해서 되지 않는다. 죽고 다시 나야 한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을 대표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다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고, 이방인을 대표한 빌라도에게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다. 하나님 같이 된 사람은 죽고 다시 나야 진실해지고, 진실 안에 있는 사람이 진리를 아는 것이다.
새하늘과 새 땅으로 표현된 새로운 인류의 나라는 죽고 다시 나서 진리(진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러므로 최종적 메시야의 표적은 모든 인간의 목적과 의도에 어긋남으로서 십자가에 처형 되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맞는 사람으로 다시 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