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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1년 10월 9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건축을 위한 생명공급(2)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4:14 -
성경 본문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건축을 위한 생명공급 (2)
목마른 사람에게 생수를 (요4:1~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던 예수는 행로에 피곤하여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 근처의 야곱의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다. 이 우물은 23~32m나 되는 깊은 우물로 현재는 그 위에 그리스정교회당이 서 있다고 한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 왕 오므리가 건설하여(왕상16:24) 앗스루가 멸망시킨 것을 로마의 분봉 왕 해롯이 재건하여 세바스데스라 칭한 곳이다. B.C. 772년 앗수르가 이를 함락시키고 유능한 자들은 다 포로로 잡아갔다. 이 때 남은 자들은 이주해온 이방인들과 혼혈이 되어 혈통과 종교(예배)가 문란해졌다.(왕하17:24, 스4:2참)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을 멸시하고 서로 교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땅이 유대와 갈릴리의 중간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이 땅을 통과해야만 했다. 예수님은 행로에 곤하여 여기 있는 야곱의 우물이라고 전해져오는 한 우물곁에 앉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먼 길을 걸어 오셨기 때문에 피곤하고 목이 마르셨고,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간 사이에 마침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온 것이다. 목이 마른 두 사람이 우연히 여기서 만난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의 핍박을 피해서 먼 길을 가시다가 목이 말라 여기 머무셨고, 이 여자는 개인적 사정으로 물을 길으러 정오에 이곳에 왔던 것이다.
경건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꺼려해서 길을 우회하는 경우가 많았고, 여인들은 보통 오후 5~6시경, 서늘할 때에 물을 길으러 나오는데 이 여자는 무슨 사정인지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으러 나와서 목이 마른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서 물을 좀 달라고 했는데 이 여자는 “물 길을 그릇도 없고 ...” 하면서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왜 내게 물을 달라 하느냐고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들을 멸시하는 유대인에게 물을 주기 싫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서 삶의 목마름을 발견하셨던 것이다. 이 여자는 다섯 남편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사람도 자기 남편이 아니라고 말한 그대로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던 여자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없는 정오에 물을 길으러 왔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여간 예수님 보시기에 이 여자는 몹시 목이 마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와는 일찍이 참 남편을 잃었다. 그래서 남편을 찾아 목이 말랐던 것이다. 이것은 인생 목마름의 본질이며 전형이다. 인생은 누구나 목마르다. 참 남편이 없으므로 목이 마른 것이다. 그래서 이곳저곳, 이 일 저 일을 찾는다.
이 여자는 다섯 번씩이나 남편을 찾아봤지만 참 남편을 찾을 수 없었다. 왜 참 남편이 없었는가? 하와는 자기가 선악과를 먹고 남편에게도 줌으로써 생명의 남편을 지식의 남편으로 만들어 버리고서는 또 자기가 먹은 지식으로 참 남편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행복을 찾으려는 인생의 모순이다.
사람은 자기가 먹은 선악과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인정받기를 바란다. 그리고는 그가 심판하시면 괴로워하고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생은 이 모순의 연속이다.
v 이것을 해결해 보려고 종교를 찾지만 사정은 더욱 악화 된다. 가까이 갈수록 선과 악은 더욱 명확하게 알아지고, 수행할 능력은 지식에 반비례해서 더욱 낮아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만 더욱더 분명해지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참 남편은 없고 심판하는 남편과 함께 살아야하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롬 7:1,2참) 그래서 이 여자는 목이 말랐다. 그런데 무엇이 부끄러웠던지 아무도 물 길으러 오지 않는 대낮을 택해서 이 우물을 찾았는데 마치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한분을 만난 것이다. 사실은 예수님도 목이 말라서 거기 계셨던 것이다. 육신은 이 여자와 다름없이 목이 말랐고 배가 고프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우리와 같이 목마르시다. 그러나 그에게는 목마름이 없는 영원한 생수가 있다. 하와가 잃어버린, 그 참 남편으로서의 생수가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영원한 배필이 있고 그 또한 배필이시다. 인생은 참된 생명의 배필이 있으면 목마르지 않다.
지식의 배필은 시행 불가능한 것만을 요구 한다. 그래서 언제나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요구 하는 자이며 누가 요구를 따라야 할 자인가? 흔히 하나님은 요구하는 자이고 인간은 그의 요구를 따라야 하는 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닌 것이다. 그것은 율법에 대한 인식이 잘못 되어서 그런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인데 인간은 율법을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받아들였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율법을 요청하고 다시 그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하와는 남편에게 선악과를 먹게 했다. 그래서 아담은 선악을 아는 남편이 되었고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심판하는 남편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제출한 선악과만큼 그 사람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아무도 판단하지 않으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다만 사람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보이려고 지식을 내놓고 판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대학에 가려고 스스로 자기 점수를 내놓고 심판을 요구한다. 입학-출세를 하기 위해서다. 인생도 그렇다. 스스로 의로운 자라는 판정을 얻으려고 지식-율법을 내 놓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도 불의하다는 판정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의(위치)를 무시하고 자기 의를 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롬9;32,33,10;3참)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마7:2참) 아내에게 선악과를 내놓으면 아내에게 심판을 받고, 형제에게 내놓으면 형제에게 심판을 받으며, 하나님에게 내놓으면 하나님에게 받는 것이다. 자기가 드린 것을 다시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장에게 그 제물을 돌려주신다.
선악과를 먹고 참 남편, 생명의 남편을 지식의 남편으로 만들어버린 인생은 항상 심판 아래 있기 때문에 목마르다. 생명을 떠난 동거는 목마르고, 심판하는 자와 함께 사는 것은 저주다.
이 여자는 참 남편이 없어서 목마른 여자로서 주님이 없어서 목마른 인생을 대표한다. 예수는 참(생명) 남편이 있음으로 생수가 되는 인생의 주님이시다. 생수가 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남편이 되신다. 주님이 계시면 목마르지 않다. 한 낮에 물을 길으러 나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