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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1년 10월 16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건축을 위한 생명공급(3)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4:19-24 -
성경 본문
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말씀 요약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건축을 위한 생명공급 (3)
예배할 곳을 찾는 사람에게 아버지를(요4:19~24)
인생이 목마른 것은 위로부터의 공급이 없기 때문이며, 방황하는 것은 온전하게 자신을 드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없어서 공급이 없음으로 목이 마르고, 참된 예배가 없어서 자신을 드리지 못해 방황하는 인생을 상징하고 있다.
이 여자는 자기의 사정을 깊이 알고 있는 예수님에게 “당신은 선지자 이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 어디가 참으로 예배 할 곳입니까? 라고 물었다.
왜 갑자기 예배 할 곳을 물었던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을 주장했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 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종교적 문제였던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여호와께서 십계명을 주신 후에 그리심 산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는 것이다.(신27;4~참) 예배는 성전에 가서 제물을 드리는 것인데 어디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정통이냐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두 사이에 오랜 동안 끊이지 않고 있었던 문제였으며 오늘 날의 종교 문제이기도 하다.
제물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 드리는 음식으로서 드리는 사람을 대신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드릴 곳이 어디냐고 물은 것이다. 이 여자는 남편이 없음으로 공급이 없었고, 예배 할 곳(드릴 곳) 때문에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땅은 주인으로부터 씨 뿌림을 받아 열매를 맺고, 그것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 드린다. 사람은 위로부터 공급받고 그 만족과 감사를 주신 이에게 드릴 때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함으로서 공급을 잃었음으로 헛되이 수고하나 열매를 얻지 못한다. 때문에 내 놓을 곳도 없고 돌려 드릴 것도 없는 것이다. 이래서 인생은 알맹이 없는 벼이삭처럼 허무하다.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룬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 같이 되려는 것은 모두 실패하고 거짓 열매만을 만들고 있다. 과학의 발전은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업적을 이루었으며 앞으로도 얼마나 더 발전을 가져 올 것인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 노력은 하면 할수록 거짓 만 만들게 된다.
특별히 종교적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아담이 타락한 후 가인과 아벨은 맨 먼저 자신의 최고의 열매로서 최선의 종교를 시작했으나 결과는 살인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들의 전통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마리아 인들은 그리심 산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역사와 전통에 따라 만들어진 어쩔 수 없는 문제였는데 이것을 최선의 방법으로 정해 놓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주장과 달리 자신이 원하는 제물을 자신이 계신 곳에서 받으신다. 성막의 제단에서 양을 제물을 받으시던 여호와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아들을 제물로 받으셨고, 성막에서 그의 백성을 부르셨던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겟세마네로 부르셨다. 그런즉 누가 그의 원하심을 알아서 그에게 드리며, 누가 그의 계신 곳을 알아서 그에게 나아갈 수 있으랴!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했다.(롬11;29)
어느 곳이 참으로 예배할 곳인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예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왔다”고 하셨다.
이것은 지역이나 역사나 교리나 전통에 결부 된 사람들의 주장 속에 있는 일체의 방법이 의미 없어졌음을 보여 주신 것이며,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왔다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실로 예배 한다”고 말씀하심으로서 예배의 실제를 보여 주셨다. 아들로서 아버지께 예배하는 것은 예배의 혁명이다.
성전에서 예배할 때는 동물로 제사했지만, 아버지께 예배 할 때는 아들로 예배드려야 하고, 제사장을 통해 드리는 대리 예배는 의식적으로 드렸지만 아버지께 예배할 때는 아들로서 영과 진실로 예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참으로 예배할 때가 왔다 아담은 생명공급이 없음으로 아들로 예배 할 수가 없었음으로 동물로 자신을 대신하고 에덴을 잃었음으로 예배드릴 곳이 없어서 지역을 신성시 하여 에덴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타락한 인간 수준에서 동물 수준의 예배를 드린 것이다.
동물로 드린 것은 동물 제사고 아들로 드린 것은 아들 제사다. 그러니까 얼마나 멀고도 이질적인 예배를 드렸던가! 동물로 아들을 대신 할 수 없고 어느 지역으로 에덴을 대신 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이런 것으로는 하나님도 만족 할 수 없었고 인간도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들로서 영과 진실로 예배를 드릴 때가 왔다. 하나님도 만족하고 사람도 행복한 예배의 때가 온 것이다. 예배란 말은 굽히다, 복종하다에서 온 말로서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실행했다. 참 예배는 공급을 받아 열매를 드리는 것이다. 피조물은 창조자의 열매로서, 아들은 아버지의 열매로서 드리는 헌신의 행위다.
그러니까 피조물의 예배는 피조물로, 아들의 예배는 아들로, 종의 예배는 종으로 드리게 된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자신을 아버지께 드렸다. 열매는 주인에게 드려지고 아들은 아버지께 드려진다. 열매는 유일한 것이다. 아들의 예배는 유일한 예배다. 아들은 아버지께 최고 최상의 유일한 제물(열매)이다. 이 얼마나 완전한 제사(예배)이며 영과 진실로 드리는 예배인가!
아들을 받으신 아버지는 완전하게 만족하셨고, 아들은 더 없는 축복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전까지의 모든 의식적 제사는 폐지 된 것이다.
인생은 공급이 없어서 목마르고, 드리지 못해서 허무한 것이다. 아담은 공급이 없으니까 드릴 것도 없어서 헛되이 노력만 하는 인간의 시조가 되었다.(창3;17~24 전1;2,3참)
공부를 했지만 성적을 내 놓을 곳이 없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대학을 졸업했으나 학벌을 내 놓을 곳이 없어서 “대학 졸업자는 고등 놈팽이”라고 했던 때가 있었다. 인생은 드려질 제물과 드려질 곳이 있어야 한다. 즉 참되고 진실하며 복된 예배가 있어야 한다. 아들로서 아버지께 드리는 영과 진실의 예배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