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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1년 10월 30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건축을 위한 생명공급(5)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4:35,36 -
성경 본문
4: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 요약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건축을 위한 생명공급 (6)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온다는 사람들에게 (요 4: 35, 36)
예수님의 “넉달이 지나야”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성지의 보리 농사가 10월 중순에 파종해서 다음 해 4월 중순부터 5월 말까지 거두니까 12월쯤에 들판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라는 견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말은 당시의 격언으로서 ‘인간사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한 말씀이라는 견해가 있다. 어쨌든, 이 말은 ‘좌우간 좀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답이 없다.’ 라는 뜻이다.
인간의 문제는 답이 없기 때문에 늘 넉 달이 지나야 한다고만 하는 것이다. 인류는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역사는 많은 착오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또 앞날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가면 갈수록 복잡해지고 혼란해진다. 답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아담의 역사는 같은 판에서의 반복일 뿐이다. 과거의 과오로 되돌아가지 않으려고 해도 가인의 길, 네피림의 길, 바벨의 길은 다시 반복된다. 세상이란 바벨로 가는 판인 것이다. (창11:1~9, 계18:1~대조)
누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겠는가? 많은 성현들이 이것을 해결해 보려고 세상에 왔었지만 조금도 개선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답이 없다. 넉 달이 지나야 되겠다” 하고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답이 없던 한 여인이 방금 추수되는 것을 보시면서 황금빛으로 무르익은 다 준비된 하나님의 추수판을 보신 것이다. 거두는 자가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는 것을 보신 것이다.(4:36)
사마리아 여자는 방금 이 들판에서 추수되었다. 먼저 왔던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추수되지 않았던 한 사람이 이렇게 쉽게 하나님의 필요 안으로 거두어진 것이다. 판이 바뀐 것이다.
판이 바뀌면 쉬워지는 수가 있다. 대기 중에서 무거운 짐이 대기권 밖에서는 가벼워진다. 더하기 판에서 곱하기 판으로만 넘어와도 계산이 너무 쉬워진다.
아담 안에서는 인생문제는 언제나 넉 달이 지나야 한다고 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교회 판으로 들어오면 희어져 지금 추수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을 판(선악과)을 살(생명과) 판으로, 저주의 판(하나님같이 됨)을 축복의 판(인격)으로, 이스라엘-율법(인간의 의)으로 짜인 판을 교회-그리스도의 판(은혜)으로 단순하게 바꾸셨다.
주님은 새 판을 여신 것이다. 인간의 필요와 하나님의 필요가 다르고 인간의 판과 하나님의 판이 다르다. 필요가 다르면 판도 달라진다.
유대주의의 판에서 본 구원은 요원하고, 세상 판에서 본 천국은 허황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본 구원은 지금이고, 교회 판에서 본 천국은 현실이다.
필요가 다르면 판이 다르고, 판이 다르면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논이라는 들판에서는 벼가 나오고, 밭이라는 들판에서 보리가 나온다. 농사의 논리는 같지만 열매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같이 되기 위한 판을 짰다. 그래서 고상해 보이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가인의 제사, 네피림의 폭력, 바벨의 혼란...이 모든 것들이 다 그 판에서 지금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국수 뽑는 기계에서 빵이 나올 수 없다. 그러니까 아담 판에서 보면 인간문제에는 답이 없다. 모두가 ‘네 탓이다’. 선생은 제자를, 제자는 선생을 탓한다. 그래도 풀지 못한 숙제는 모두 사후 세계로 미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판에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길, 즉 하나님께로 수확되는 길, 영생의 길이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들판 같다. 그래서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은다”고 했다.(36)
종교는 정성을, 율법은 열심을, 양심은 깨끗함을 끝없이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 안에서 사마리아 여자는 누가 봐도 문제투성이고 자기가 자기를 봐도 한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 판에서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간단히 수확이 되었다.
이 일은 새 판, 즉 예수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판은 생명의 판이다. 이것은 기술로 만든 것이 아니다. 새는 새의 판을, 소는 소의 판을 만든다. 이와 같이 아담은 아담 판을, 예수는 예수 판을 만든 것이다. 그 생명이 있는 곳에 그 판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있는 곳에 새 판이 만들어지고 새 일이 일어난다.
예수님이 무슨 심오한 말씀을 하셨거나 비밀한 말씀을 하셔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자신으로서는 당연하게 일상적으로 말씀을 하셨겠지만 그 여자에게는 새로운 말씀이었고 새로운 세계였던 것이다.
우리가 쉽고 당연하게 한 말이 상대방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일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다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 새 사람으로서, 새 나라의 사람으로서, 새 판에서 온 사람으로서 세상을 깨우는 빛이 되기를 원한다.
교회는 새 사람이니까 새 판이다. 세상과 다른 판이다. 인간이 하나님같이 되어 보겠다는 판이 아니라, 구속 받은 새 생명으로 짜인 은혜 아래 있는 판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 받았고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다. 잃었던 인격을 다시 받았다. 그러니까 모두가 은혜다. 교회는 은혜의 판이다.
세상은 은혜를 거부하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경쟁 하는 판이다. 그러니까 각박할 수밖에 없고 땀이 날 수 밖에 없다. 땀은 곧 부패하고 악취가 난다. 이것이 아담이 만든 세상의 특성이다.
세상은 자기 의를 세우려 하니까 싸움을 일으키고 자멸의 길로 가는 것이다.(가인의 길) 세상 일은 하나같이 의를 세우자고 시작하지만 불의로 끝을 맺는다. 정의를 세우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롬3:10)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 외에 (인간의 의와 관계된) 자신의 한 의를 나타내셨다.(롬3:21) 이것은 율법과 상관없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엔 차별이 없다. (롬3:21~24참)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롬3:26참)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는 어떤 분이셨는가? 종교적 특권층과 율법주의자들이 본 예수는 한마디로 이단자, 혹세무민하는 자, 참람한 자로서 민족과 유대교를 위해 제거해야 할 사람이었고, 반대로 그를 따르던 광범위한 의미의 제자들과, 특별한 제자들이 만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하나님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을 박아도 죽지 않을 수 있는 사람으로 믿어졌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이다. 유대인의 예상으로는 그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고, 제자들의 믿음 안에서는 그가 죽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를 “우리 범죄함 때문에 죽음에 내어 주시고, 우리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리신 것”이다.(행2:23, 롬4:25참)
예수는 하나님 같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히니 죽었고, 죽은 자로 알았는데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생각이나 믿음을 다 무효처리하시고 한 새 사람을 세우신 것이다.
그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복종하고 죽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고 그를 새 인류의 주로 세우셨다.
그는 참 사람이시고 의인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같이 되려는 생각(죄)을 버리고, 이 사람을 참 사람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으로, 각자가 다 그의 운명 안에 있는 사람으로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조건 없이(율법적 조건) 의롭다고 하심으로써 이참에 자신도 의로우시고 예수를 믿는 자들도 의롭다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판, 즉 예수 판이다.(롬3:21~31참) 그는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시고 아들로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차별이 없다. 여기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나 무할례나, 선이나 악이나, 의나 불의나,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무효화 되고 하나님의 의(예수)로 구원 받은 사람들뿐이다. 의인은 없다. 단지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 사람들이 바로 교회로서, 새로운 판이다. 옛 판이 인간의 의와 율법의 의와 선악의 의로 짜인 것이라면 새 판은 오직 하나님의 의(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주시고 그를 믿어 영생을 얻게 하심)로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판 안으로 사람을 부르신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함께 있는 이 판에서 우리도 그들과 함께 양식을 먹자.
인간의 의, 즉 자기양심의 의나 율법의 의는 자기 자랑과 교만, 판단과 정죄가 있지만, 하나님의 의 안에는 감사와 찬양과 예수 자랑함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들은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후10:17)하였다.
이 새 판에서는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을 추수한다.이성이나 철학이나, 양심이나 도덕이나, 율법이나 종교에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같아질 수 없는 인간 그대로인 사람,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 같은 사람,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을 추수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을 다른 조건 없이(값없이) 추수하는 곳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를 추수하고 만족하셨기 때문에 온 인류를 다 추수하는 들판으로 보셨던 것이다. 예수 안에서는 누구나 쉽게 추수될 수 있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만 하지 않으면 누구나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