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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1년 11월 20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건축을 위한 생명공급(8)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4:39-42 -
성경 본문
4: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말씀 요약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건축을 위한 생명공급 (8)
사마라아인들의 구세주
(요4:39~42)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사람을 와 보라”는 한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친히 만나 본 후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예수를 “참 세상의 구주”신 줄 믿었다고 한다.
그녀가 행한 일은 무엇이었으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녀는 남편을 찾아다니느라고 목이 말랐고, 예배할 곳을 알지 못해서 이 산으로, 혹은 저 산으로 헤매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목이 말라 생수를 바라는 여자에게 네 남편을 데려오라 하셨고, 예배할 곳을 찾는 사마리아 인에게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왔다고 하셨다.
이 여자가 목마른 것은 남편이 없었기 때문이며, 사마리아인으로서 예배할 곳을 알지 못한 것은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배필이 없어서 목이 마르고, 아버지가 없어서 헷갈리는 것이다.
인생은 출생, 성장의 과정을 거쳐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 것이다. 즉, 배필을 만나서 자식을 열매로 거두는 것이다. 자식은 생물학적 인간의 최종 열매다.
그래서 창세기 5장에서는 이런 인생을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고, 그 후 팔백 칠 년을 지내며 자식을 낳았으며, 그가 구백 십 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는 식으로 정리해 놓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출생과 성장을 마치고 자식을 낳아야 하는 결혼의 과정에서 자식을 낳을 배필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씨는 뿌렸으나 열매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자식을 낳아줄 참 남편이 없었던 것이다.
꽃은 피웠으나 찾아오는 나비가 없어서 그대로 시들 판이었다. 농장에서는 꽃 필 때 비가 오거나 서리가 내리면 그 해 농사를 망친다. 인생도 그렇다. 인생은 결혼해서 자식을 열매로 거둔다. 하나님은 창조해서 나라를 얻고 인생은 결혼해서 자식을 얻는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남편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또 예배할 곳을 물었던가? 남편이 없으니까 예배할 곳을 찾은 것이다. 땅은 남편이 있는 곳이고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그녀는 땅에서는 소망이 없었다. 그래서 하늘을 찾은 것이다.
다말은 씨를 얻으려고 결사적인 행동을 했고, 기생 라합은 나라를 얻으려고 죽음을 각오하고 이스라엘 정탐꾼에게 자신의 운명을 의탁했다. 이 여자들은 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땅에 소망이 없어서 하늘 문을 두드렸던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이 여자를 남편에게로 이끌지 않고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고 하셨다.예배할 아버지께로 인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물동이를 놓아 둔 채 동네에 가서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라고 했던 것이다. 그녀는 대답을 들은 것이다. (‘말하다’라는 단어는 ‘대답하다’라는 뜻이다.)
아버지 앞에 오면 여자와 남자는 창조 안에서 한 육체이고(창2:24), 유대인과 이방인은 아브라함 안에서 하나다.(엡2:15) 참으로 간단하지 않은가! 아버지 앞으로만 오면 된다.
우리에게는 한 아버지만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에게는 유일하신 조상 아브라함이 있고, 우리에게는 유일하신 구속자 예수가 있을 뿐이다. 인류에게는 한 창조자가 있다. 그 안에서 많은 것이 하나이고 모든 것이 간단하다.
예수는 우리를 단순화시켜 주셨다. 십자가를 통해 모든 것을 처리하고 새것을 가져 오셨다. 창조 안으로 이끄시고 새 창조를 이루셨다. 이것은 용광로에서 철물을 다시 만든 것과 같다.
남편이 없어서 다섯 번이나 남자를 찾았고, 사마리아인이 됨으로써 예배할 곳을 잃었던 여인은 창조의 태초에서, 구속의 은혜에서 새 사람이 된 인생의 한 표본이다.
그리스도는 이탈한 인간을 근본이신 아버지께로 이끄셨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다가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근본을 떠난 인간은 아버지를 거부한다. 아주 신성한(?) 방법으로 근원을 멀리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위대하신데 인간이 어찌 감히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요10:36참)
얼핏 듣기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하려는 사단의 수작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떻게 하나가 되며, 인류가 어떻게 하나가 되겠는가?
하나님 안에서 인류는 하나이고, 아브라함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이며, 예수 안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은 하나다. 예수의 십자가는 인류를 하나로 불러 모으는 판이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둘이지만 예수 안에서는 하나인 것이다. 근원을 가려놓고 분열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사단의 수작에 말려든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인류는 하나라고 증거해야 한다. 교리나 교파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원수 되게 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본이라고 하면 안 된다.
예수는 사마리아인들을 아버지 안으로 부르셨다. 그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다.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다. 강대국의 침략으로 혼혈족이 되었고, 유대인들에게 버림받고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움으로써 배도자가 되었던 사마리아인들을 당당하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시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는 세상의 구주시기에 합당하다.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분,(엡2:14)
모든 문제를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히12:29)
새 생명으로 다시 나게 하신 생명의 주,(행3:15)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신 새 창조의 주, (계21:5)
유대인과 이방인을 교회 되게 하는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골1:18)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의 영광”,(눅2:32)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 (마2:14)이시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온 평화,(찬348)
이것은 아담이 만든 평화와 얼마나 다른가 !
선악을 위해서 만들어진 평화보다 얼마나 온전한가! 우리가 누릴 평화,
우리가 전할 평화,
주 예수의 평화!
사마리아인들은 “네가 말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알았다”고 했다.
이제는 우리는 누가 말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친히 보고 듣고 만지고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