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2011년 11월 27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건축을 위한 생명공급(9)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4:43-54 -
성경 본문
4: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4: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4: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4: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4: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4: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말씀 요약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건축을 위한 생명공급 (9)
변방에서 영접 받으심
(요 4:43~54)
사마리아인들의 구세주 되신 예수님은 이틀을 거기서 유하신 후에 갈릴리로 내려가셨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북쪽의 변방이었다. 성전도 제사장도 없는, 신성한 것들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가련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예수께서 자라나신 고향 땅이었다.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배척 받고 설 자리가 없을 때면 그래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인정이 있는 곳이었다. 이때도 예수님은 이런 연유로 고향에 돌아오시던 길이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는 만족스러운 수확을 거두셨다. 그 후, 갈릴리에 가신 예수님은 영접을 받으시고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그 지방에 믿음이 확산 되었다. 주님은 예루살렘만 떠나시면 각지에서 환영을 받으셨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갈릴리에 가시자 사람들이 그를 영접했는데 이것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심으로 그 온 집이 믿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고 내려오셨는데 갈릴리 사람들은 그를 영접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향이란 하나님의 성인 예루살렘을 말한 것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니까 예루살렘은 당연히 선지자가 영접 받아야 할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어떤 선지자도 영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마23:37참)
그곳은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으며 서기관과 율법사들이 있는 곳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그 환경과 분위기가 또 얼마나 신령한 곳인가? 그곳은 바로 신성한 판이 다 준비되어 있는 듯한 곳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은 발 붙일 데가 없는 곳이었다.(마21:33~39참)
이런 것을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신성한 곳을 만들어 놓고 신성한 신을 모셔서 신성한 예배 드리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그것을 보편화시키는 것을 금지하고 ‘신성불가침’이라는 경고판을 붙여버리는 것이다.
그래 놓고는 특정한 사람들이 그것을 독점하고 기득권을 주장한다. 자격증을 만들고 전문가를 양성해 놓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성을 관리하고 지키게 한다. 이 사람들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이 신성을 접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종교가 커질수록 하나님의 입지는 작아지고 종교가 위대해질수록 하나님은 왜소해진다. 껍데기는 커지고 알맹이는 작아진다. 주 예수님은 유대교의 성지 예루살렘에서 설 자리가 없으셨다. 성 안에서는 한 몸 죽을 자리마저도 없었고, 그들에 의해 성문 밖으로 내쳐지셨던 것이다.
종교는 약할 때는 어린양이 되었다가 커지면 호랑이가 되는 이상한 동물과 같다. 기독교도 어렸을 때는 핍박을 받는 어린양이었으나 큰 다음에는 핍박하는 잔인한 짐승으로 변했던 것이다. 신성한 심판대를 만들어 놓고 예수의 이름으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육하고도 아직도 반성이 없는 것이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격언은 원래 사람이 객지에 나가서 아무리 높아진다 해도 고향에서는 어렸을 때를 잘 아니까 별로 높여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격언을 자신과 유대 종교의 성지라고 하는 예루살렘과 연관 지어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을 보면, 성전은 아버지 집이고 성지는 아버지의 도성이다. 그러니까 그곳은 예수님의 진짜 고향인 것이다. 예수님은 거기 계셔야 당연한 분이다. 그러나 배척을 받으셨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의 영역을 빼앗길까 봐 경계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갈릴리 사람들은 그의 행한 일을 보고 그를 영접했던 것이다. 신성한 도성에서는 그의 행한 일을 보고 분노하고 배척했으나 변방에서는 행한 일을 보고 영접했다. 그들은 다 한 곳에서 그의 행한 일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서로 생각과 사상이 다르고 입장과 판이 달라서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기득권이 있었다. 그래서 손해 보지 않으려고 새것을 거부했고, 변방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새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간단한 이치다. 빈병에는 언제나 새것을 채울 수 있다. 그러나 병 안에 이미 다른 것이 있다면 새것을 넣을 수 없는 것이다.(눅5:37참)
복음 전파의 어려움은 이 때문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이미 자리 잡고 기득권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교회건축의 가장 큰 장애물은 선악과다. 사람들은 모두 다 어찌나 선을 옹호하고 의를 높이는지,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누가 선이나 정의의 깃발을 들고 한 번 흔들기만 하면 모든 일을 다 제쳐 놓고 벌떼처럼 모여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응 " 의인은 없나니 하도 없다"하셨다.(롬3;10)
복음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교회는 선과 악의 전쟁판이 된다. 선이나 악이나 다 자기가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그 기득권을 사랑하고 지키려고 모여드는 것이다.
주님은 종교 기득권자들에게 배척 받고 시골로 내려가셨는데 가는 길에 사마리아에서 큰 위로를 받으셨고 갈릴리에서 영접 받고 왕의 신하의 간청을 들어주셨다. 주님은 갈급한 사람들로부터 기다림과 영접을 받으셨던 것이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한다” 하시고도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 말씀의 일차적 의미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서야 믿는 것은 좋지 못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믿음을 표적과 기사에 의존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계시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더욱 좋지 못한 것이다. 가장 좋은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이다.(요20:29참) 표적이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얼핏 들으면 책망하는 말 같으나 실은 사랑의 도전이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들은 왕의 신하는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 라고 했고 예수께서는 그 때 “네 아들이 살았다” 하셨는데 이 말을 믿고 그 사람이 내려갔다는 것이다.
가난하고 갈급한 사람은 책망까지도 사랑의 말로 받아들인다. 왕의 신하는 30km의 길을 걸어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 온 사람이었다. 책망과 징계는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을 꾸짖고 징계하겠는가? 하나님은 때때로 보다 적극적인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위해서 책망과 징계로 도전하시는 것이다.(막7:24~30 참)
가난하고 갈급한 곳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능력이 나타났다. 복음은 이런 곳에 머물고 여기서부터 전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