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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1년 12월 4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건축을 위한 생명공급(10)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5:1-9 -
성경 본문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말씀 요약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건축을 위한 생명공급 (10)
병든 자들을 고치심(5:1~47)
a. 부림절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5:1~9)
명절에 예루살렘에는 양문 곁 베데스다라는 연못가에 만은 병자들이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간 사람이 고침을 받는다고 해서 그런 것이다. 예수님은 그 중에 삼십 팔년 된 환자를 고쳐 주셨다.
여기 명절이란 주님의 공생에 제 일 년의 유월절과 (2;13~25) 제 이년 유월절(6;10) 사이에 있는 부림절 이었던 것 같다. 38년은 고난의 때이며, 부림절은 연약함으로 포로 잡혔던 파사에서 생명을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다. (에9;26~32)
예수님은 자기 힘으로는 연못에도 뛰어들지 못한 38년 된 환자를 고쳐주셨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들은 광야에서 38년을 방황했고, 부림절에 구원을 받았다. 사도는 이점을 부각 시키려고 특별히 이 사건을 기술했을 것이다.
바른 길을 이탈한 인간이 복된 땅을 찾아가는 과정은 38년의 광야 길과 같고, 연약해서 죄에 빠진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난 것은 부림절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광야생활은 앞을 예측 할 수없는 불확실성의 날들이다. 오로지 스스로 선악을 분별해서 그날그날을 살아가야 한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이정표로 주고, 또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광야에서는 하나님도 이 방법 외에는 달리 도울 수가 없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일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그가 임금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별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서는 율법을 길잡이로 삼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르며,
아침이면 내리는 만나를 먹고,
때때로 도우시는 은혜를 입어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다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물이 동할 때 먼저 뛰어 들어가면 고침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언제 물이 동할지 알 수 없으며, 또 동한다 할지라도 힘이 없어서 남보다 먼저 뛰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이것이 이 환자의 문제였으며 또한 인간의 문제다.
광야에서는 발이 있어도 길이 없었고, 포로 된 땅에서는 멸망의 날이 정해졌지만 스스로 자기들을 구원 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왕 앞에 섬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은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스더와 같이 이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려고 접근하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못에 나를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
“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주님은 이 환자에게 에스더와 같은 구원자였다. 주님은 구원하려고 다가오신다.
이것은 부림절에 일어난 일이었다. 병들어 약해진 자들에게 실제적인 부림절이 온 것이다. 이스라엘과 인간은 구원자가 필요함에 있어서 한 입장이며 한 운명이다.
불가에서는 인생은 해탈하기 전까지 육도를 윤회하는데 해탈하여 나오려면 스스로 개달아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은 아담은 가시덤불 사이에서 나오려면 구원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구원자로 인하여 바로의 손에서 구원을 받았고,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생명을 얻었다.
인간은 스스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 든 것이다. 불가에서는 스스로 빠져나오라고 한다. 하지만 이 환자는 자기 힘으로는 연못에 뛰어들 힘마저 없었던 것이다.
인생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모든 것을 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도움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낫고자 하느냐?”고 뭇지만 않으시고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가라” 하셨다. 여호와는 모세를 부르시고
“너는 내 백성을 인도하라”
“너는 바로 앞에 신이 되리라”
“너희는 오늘날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보라”......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해야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을 하신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다. 연못에 넣어준 것이 아니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 것이다.
만물은 창조자가 “있으라” 한대로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고, 환자는 그대로 걸어 간 것이다. 이것이 전부였다. 우리도 그분이 있으라 하시니 있고, 또 가라 하시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다.
주님 앞에서는 38년도 없고, 제 힘으로 뛰어 들어가야 하는 베데스다 연못도 없다. 먼저 뛰어 들 자도 없고 바라만 보고 있을 자도 없는 것이다. 다만 주님의 말씀하심이 있을 뿐이다.
부림절에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 놓았고, 주님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롬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