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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2년 1월 22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건축을 위한 생명공급(17)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7:52 -
성경 본문
7: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말씀 요약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건축을 위한 생명공급 (17)
목마른 사람들을 해갈시킴(요7:52)
잔치는 공허하고, 수양은 생명이 없으며, 종교는 목마르게 하고, 천사숭배는 인격을 소모하며, 규례들은 회복을 방해하고, 세상은 배고프게 하며, 축제는 갈증 나게 한다.
유대인의 명절인 장막절이 왔다. 유월절은 시작하는 절기이고(레23:5,34), 장막절은 완성의 절기다(출23:16). 인생은 유월절로 시작해서 장막절로 완성된다. 예수께서는 유월절에 거듭남을 말씀하셨고, 장막절에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을 약속하셨다. 거듭난 생명은 생수가 흐르는 보좌 앞에서 살게 된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관원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줄 아시고 갈릴리에 은거하시며, 나타나게 일하지 아니하시니 형제들까지도 야유하고 무시하였다. 그러나 명절이 이르자 형제들을 따돌리고 은밀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는 모르나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있다” 등을 말씀하셨고 이에 대하여 군중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으며 바리새인들은 그를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군중들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좋은 사람이다”, 혹은 “아니다, 미혹하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한 사람들은 많았겠지만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아무도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배운 적도 없는데 어찌 글을 아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놀랍다는 의미도 되고, 무시해서 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보내신 이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 증거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의 말과 계시가 신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목적이 분명하고, 동기가 분명하며, 말하는 자의 사명이 분명하다. 불의가 없기 때문에 신비를 내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를 드셨다. 내가 안식일에 병 고친 것으로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지만, 할례를 행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범할 수 있다면, 38년 된 병자를 고치기 위해서도 안식일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겉모양에(율법이나 규례들이나 유전 같은 것들) 따라 판단하지 말고 의로운 판단을 하라고 하셨다. 법에 매이면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지만, 너희는 그분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이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다.
그러면 예수께서 스스로 오시지 않고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답은 단순하다. 그가 행하신 일과 말씀이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소망에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무엇을 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실족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열심이 있었으나 기다리던 그리스도를 스스로 버린 백성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는 잠시 동안 너희와 함께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간다 하시고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고 나 있는 곳에 올 수도 없다고 하셨다. 주님은 동에 있었고 그들은 서에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과 육신의 일을 구하는 사람은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그 입장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찾아가도 길이 다르니까 만날 수 없으며, 입장과 소망이 다르니까 그가 계신 곳에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보냄을 받아서 온 사람은 근원이 있는 사람이다. 아담은 자신의 근원을 이탈했다. 그러므로 근원을 숨긴다. 근원을 인정하면 자신이 하나님 같이 되려는 자로 판명되고, 불의한 자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무슨 방법 (세상으로, 종교로, 규례들로, 의식으로, 전통 등)으로든지 근원을 숨기려 한다. 그러나 근원을 부정하려고 하면 옹색한 변명밖에 없고, 신성한 공급의 흐름이 없으므로 영원히 목마르고, 메마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 배(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다” 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십자가의 진실과, 부활의 영광으로 믿는 자들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되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속했으며 부활은 소망을 새롭게 했다. 진실 안에서 주의 영광을 본 사람은 그 영광이 원천이 되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된다.
근원이 있는 사람은 깊은 곳에 강물이 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셨고, 세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발원하여 생명나무를 자라게 한다.
강은 발원지에서 흐르고, 생수는 샘에서 솟아난다. 스스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근원을 인정한 사람은 위로부터 오는 은혜를 샘물 같이, 언제나 마실 수 있는 것이다. 끝없는 변명은 사라지고 감사가 온다.
주님은 근원으로부터 오신 분으로서 생명의 물이 흐르는 강이며, 인생이 걸어가는 길이고, 영생을 호흡할 그 영이시다.
그런데 사람들 안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분열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자다.‘, ”이가 그리스도다.”, ”그 사람이 말한 것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다.” 하였으나 바리새인들과 관원들은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올 수 없다.” 하고 성경을 들어 배척해 버렸다.
그러나 선지자와 그리스도는 어느 때, 어디에서도 올 수 있고, 나를 구원할 자는 어느 때, 어디에서도 올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오시는 길에서 그를 기다려야 하고, 그가 가시는 길을 따라 가야 한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데 열심이 있었으나 자기들의 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자기들의 방법으로 그를 따랐기 때문에 오신 이는 만나지 못했고, 가시는 이는 따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스도 외의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그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음으로써 그들을 불행하게 한 것이다.
단순하게, 오시는 길에서 그를 만나고, 가시는 길로 그를 따르자.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