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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2년 1월 29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건축을 위한 생명공급(18)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8:1-11 -
성경 본문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건축을 위한 생명공급 (18)
죄 지은 자를 용서하심(요8;1-11)
유대인의 율법에는 간음한 자는 둘 다 죽이라 (레20;10) 했고, 약혼한 여자가 간음했을 때는 돌로 쳐 죽이라 하였다.(신22;23,24)
이 여인을 끌고 예수께 온 것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려 고소할 조건을 만들고 백성들에게 불신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용서한다 하면 율법을 범했다고 종교법정에 고소할 것이고, 죽이라 한다면 로마법을 위반했다고 로마법정에 고소하려는 것이었다. (유대인에게는 사형선고권이 없음)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탁월한 생명으로 죄를 사하고 자유를 주시는 권세를 나타내셨다. 이 생명에는 권세가 있다
2장에서 7장까지는 주님이 생명의 공급자이심을, 8장에서 10장까지는 생명 되심을 계시하려고 쓰여 졌다. 예수님은 죄(8장)와 눈멂(9장)과 죽음(10장)을 해결하는 생명이 되신다.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은 죄로 말미암아 죽임 당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대표해서 율법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다. 범죄한 자는 법으로 심판을 받는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범죄에 대해서 율법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세인들이 이 여자를 붙잡아 왔는데 학자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고 바리세인들은 율법을 배운 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율법 전문가는 정죄와 심판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오늘날도 교리나 교회법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정죄 전문가들이기 쉽다.
“모세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 하겠느냐”는 것으로 보면 이 여자는 약혼한 처녀가 아니었을까? (신22;23-24) 그런데 이제는 결혼은 고사하고 죽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는 여자가 된 것이다. 율법 안에서는 살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범죄한 인생의 운명과 같다. 사람은 하나님과 약혼한 처녀와 같았던 것이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이 여자를 살릴 것인가? 이 문제는 범죄한 인간을 누가 어떻게 구원하여 혼인의 달콤함으로 인도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같은 것이다.
법은 질서와 치안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나, 억울한 피해자를 돕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러나 범죄에 대해서는 무자비하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살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다. 그러자 살기가 등등했던 그들은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씩 둘씩 빠져나가고 여자와 예수님만 남았다. 주님은 “너를 정죄하던 자들이 없느냐” 하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셨다.
주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여자를 살렸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자랑하는 율법이라는 무기에 의해서 자기들이 죽임 당할 고발 자들도 살리신 것이다. 주님의 생명 안에는 모두를 살리는 지혜가 있다.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 같은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율법을 가진 자는 자기도 그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가지고 정죄와 심판을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오신 분이다. 율법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도 그 율법에 의해 죽임 당한다는 것을 모르고 남을 죽이려 했다. 그들이 이 여자를 돌로 쳤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벼락으로 쳤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양편 모두를 살리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모든 부정적인 결과의 원인을 범죄로 보는 사람들인데 여러 가지 범죄 중에 여기에 간음죄를 범죄의 표본으로 제시하게 된 것은 이 죄가 죄의 속박과 자유에 관계 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죄를 사하고 사람을 살리실 뿐 아니라 정죄하는 율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분이다.
범죄는 양심과 도덕성에서 인간을 속박하고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그 중에 간음에 대한 인간의 생각과 관념은 더욱 그러하다. 인간은 성이 발전하면서 수치심이 생기고, 양심과 도덕이 관여하며, 그 밖으로는 사회적인 법이 몇 겹으로 이를 제한하고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이 사회적 문제이며 인간의 욕망의 극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어디로 보나 살 길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이 여자를 살리셨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은 법을 무시하고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육신의 생명을 살려서 그에게 인자의 생명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생명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법은 다만 생명이 더 안전하게 살기 위해 있는 것이며, 양심과 도덕 역시 더 나은 인생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위해서 생명을 희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셨고 구속하셨으며 또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주님의 관심은 오직 생명에 있다. 육신의 생명이든 영원한 생명이든 생명은 다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그런즉 누가 사람을 살리며,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할 것인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생명을 귀중히 여기고, 예수님은 구속하시는 인자로서 사람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자신도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율법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심판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자비를 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도 범죄에 대하여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살리심과 심판과 영생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논쟁하는 중에 간음한 여인의 문제를 삽입한 것은 참된 심판자가 누구이며 살리는 자가 누구인가를 계시하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그들은 율법과 제도가 전부인줄 알고 그런 것들을 가지고 예수님을 공격했지만, 심판하는 권세와 살리는 능력은 인자에게 있었다. 주님은 심판하고 살리신다.
사람들은 인자를 무시하고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자신의 체면을 세우려 한다. 그 결과 율법과 제도로 사람을 죽이기까지도 하는 것이다.
인자를 무시하고 신만을 절대적으로 공경한다는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아담은 인자를 버리고 천사를 따랐으며, 가인은 인자를 무시하고 아벨을 죽였던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구할 자는 인자다.
인자는 우리가 먹고 살아야 할 양식으로 하나님이 인 치신 자다. 인자를 먹는 그 사람은 인자로 인하여 삶으로서 그와 함께 사람을 살린다.
예수님은 인자로서 이 여인을 살렸다. 이 여자도 평소에는 신을 공경하고 율법 학자나 바리세인을 존경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를 죽이려했고, 자기가 무시했던 한 사람이 자기를 살린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를 정죄하고 심판할 자를 앙모하고 구원할 자는 멸시한다. 하나님은 범죄와 율법의 심판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인자의 생명으로 다시 살려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신다.
※ 이스라엘의 앙모하는 자는 구원의 하나님이고, 예수님은 위해한 주님이 아니라 구속자 -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위해한 앙모자를 찾지 말고, 인자라도 구원할 자를 찾으라. 사망에 빠진 자에게는 오로지 구원자가 위대한 자인 것이다.
사리는 자가 누구인가? 이방인의 신 관념은 완전무결 이지만 이스라엘의 관념은 오로지 구원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