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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2년 4월 15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생명의 건축과 건축자(3)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10:14-15 -
성경 본문
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10:4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1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0: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0: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0:19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10: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10:21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생명의 건축과 건축자
A. 선한 목자(10:1-21)
10. 양들을 앎(속, 생명의 건축과 건축자 )
“내가 양들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가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10:14)
요한복음은 1~9장까지는 아홉 가지 사례를 들어서 그리스도는 인생의 참 필요라는 것을 계시했는데 10장에서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시는 분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이것은 필요보다 더 깊은 관계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원천적으로 관계의 단절에서 온 것이다. 선악과의 목표는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단절은 죽음을 가져왔고 죽음은 어둠의 일들을 가져왔다. 아담은 하나님의 동산을 떠났고 가인은 아벨을 죽였으며....
그러므로 구원은 관계의 회복이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전선이 끊어지면 당연히 전기가 공급되지 않고 어둠이 온다. 어둠은 단절의 결과다. 그러니까 급선무는 단절된 전선을 연결하는 것이다.
누가 이 끊어진 관계를 연결할 것인가?
많은 방법이 시도되었지만 다 온전하지 못했다. 이방인들은 종교와 도덕과 깨달음 같은 것들로 어둠을 해결하려고 시도했으나 인간이 그 숙제를 감당치 못했고, 직접 신이 되려고까지 했지만 인생의 한계를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은 율법과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했으나 율법의 내용인 하나님 마음을 담을 수 없었고, 제사의 실제인 참 순종을 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이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는 이방인의 방법으로나, 유대인의 방법으로 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해결하셨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참 사람의 위치를 잃었다. 그러므로 그는 근원으로 돌아가서 낳으신 아버지 앞으로, 지으신 창조자 앞으로 나아가셨다. 끊어진 선을 연결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참 아들이며, 창조자가 원하는 것은 참 사람이다. 여호와는 오직 한 가지를 물으신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지 않고서 결과를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모한 것이다.
그의 물음에 대한 인생이 해야 할 대답은 이미 정해졌다. 다른 대답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이 대답을 가지고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심으로써 인생의 위치를 회복하시고 그 위치에 우리를 포함하셨다.
이 위치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안다. 하나님은 인간을 아시고 인간도 하나님을 알며, 아버지는 아들을 알고 아들은 아버지를 알며, 너는 나를 알고 나는 너를 아는 것이다. 바른 위치에 있으면 모든 것을 바로 안다.
“나는 양들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가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 하셨다.
그러므로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도적이며 강도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후에 유대에는 그리스도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을 회복한다고 백성들을 선동했으나 결국 멸망 당하고 백성들을 죽음과 고통에 몰아넣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바라바 같은 사람이다. 그는 반역죄(민란)로 십자가에 달린 죄인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을 지칭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주권을 잃은 후 그들의 주권을 회복시킬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 메시야라 하고 혹세무민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람들이다.
예수는 양들을 앎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안다는 상식으로 주님은 자신과 믿는 자들을 비유하셨다.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표현한 경우가 많다. 목자와 양은 생활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사람을 아시고, 예수는 자신으로 구속한 사람들을 아신다. 그러므로 인생은 지음 받은 자로서 창조자에게 알려져 있고, 구속받은 사람으로서 구속자에게 알려져 있다. 주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을 알고 계신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여러 가지 모색을 한다. 그러나 위치를 이탈한 인간은 그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방법으로 알았다고 하는 모든 지식과 경험들은 허구이거나 왜곡이다. 종교마다 다 자기가 아는 하나님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누가 참 하나님인가? 혼란스럽게만 만드는 것이다.
과학적인 실험과 증명이 불가능한 것은 어차피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각자의 경험과 믿음 대로 살아서 그 결과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인 증명을 거부하고 지식과 믿음만을 주장함으로써 혼란스럽게만 하는 것이다.
양의 위치에 있으면 목자를 알고, 피조물의 위치에 있으면 창조자를 알며, 구속 받은 자는 구속의 주를 안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하셨다. 주님은 참 사람으로서 우리를 알고 계신 참 좋은 목자시다.
# 피조물은 창조자에게, 구속 받은 자는 구속자에게 이미 알려졌다. 그러므로 그가 먼저 나를 아신다는 것을 알면 곧, 그를 아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