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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2년 5월 20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생명의 건축과 건축자(8)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10:40-42 -
성경 본문
10:40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10: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참이라 하더라
10: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생명의 건축과 건축자
생명의 번식(건축)을 위한 한 알의 밀(11:~21:)
1. 베다니의 전환(요10:40-42)
예루살렘에서 배척을 받으신 예수께서는 요단강 저편 베다니로 가셨다. 베다니는 요한이 처음으로 침례를 주던 곳이며 예수께서 침례 받으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으셨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나는 그의 신 들메도 감당치 못 한다”, “나는 물로 침례를 주지만 그는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줄 것이다“ 라고 하는 침례요한의 증거를 받았던 곳이다.
침례요한은 메시야가 오기 전에 먼저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예언되었고,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했기 때문에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전에 반드시 다시 올 것이라 믿어졌었고, 예수께서도 친히 그렇게 증거하셨다.(말4:5,마11:10) 그러므로 그의 증거는 예수의 사역을 크게 고무시켰을 것이다.
또한 하늘 아버지의 증거는 성령이 그 위에 비둘기처럼 머무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확인하신 것이었다.(마3:16) 이것은 공식적인 기름부음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수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이 증거를 받고 메시야의 소명을 받은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베다니는 예수의 사역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면초가가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선지자의 격려를 받았던 사역의 시발점인 베다니로 가신 것 같다. 다시 격려를 받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의외로 침례요한의 증거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는 것이다. 핍박을 받으시던 예수께서는 잠시나마 큰 위로와 격려를 받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도 주님을 접한 사람들 중에는 믿는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있다 해도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육체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믿고 영접한다 해도 생명은 하나 되지 않는다. 생명이 하나 되지 않으면 여전히 물과 기름이다. 반대는 더욱 심해갔고 이제는 영접하기는 커녕 죽여 없애려고 모의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여호와께 대한 믿음이 신실한 사람들이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강한 백성이다. 그러나 그들의 본성은 바뀌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은총 위에 또 은총을 베푸시고 천하에 없는 선지자를 보내서 더 없는 증거와 말씀을 주었어도 그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변질시키고 자기방식으로 받음으로써 왜곡시켜 버렸던 것이다. 한 생명이 아닌 한, 인간의 믿음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크신 일을 친히 본 백성이었으나 그의 영원한 나라가 되지 못했다. 예수님 역시 그가 많은 일을 행하셨으나 소수의 사람들 이외에는 믿지 않았다. 혹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열광적으로 믿었다 해도 그 사람들과 그들의 믿음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건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믿고 받아들임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한계가 있었다. 또한 믿음의 세계에는 통일이 있을 수 없다. 언제나 찬성과 반대 두 편으로 갈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생명의 세계는 하나다. 그러므로 건축을 위해서는 믿음보다 생명이 더 온전하다.
그러므로 행하심의 사역에서 생명의 번식의 사역으로, 보여주고 함께 하는 사역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사역으로 전환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생명은 믿어질 뿐 아니라 연합된다. 그러므로 생명의 번식은 믿음을 완성한다. 이 사역의 전환을 위해서 사역의 시발점이었던 베다니를 다시 찾으신 것 같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에게 그 생명을 분배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씨)이시다. 육체가 되심은 단순히 장막이 되어 보여주고 만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함께 죽고 함께 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체가 되신 하나님의 독생자는 부활생명의 씨가 되어야 했다.
한 알의 씨는 땅에 떨어져 죽으면 30배, 60배의 번식이 일어난다. 번식은 아무리 많아도 한 생명이며 한 생명은 한 길, 한 생각, 한 마음을 갖는다. 그러므로 완전한 건축을 위해서는 아들의 생명이 번식되어야 한다.
여호와는 성막에서 백성을 만나셨다. 이와 같이 말씀은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이 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러 방면으로 그를 만났다.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잔치집의 신랑으로, 거듭나게 하는 독생자로, 참된 예배의 본으로, 천사숭배에서 해방시키는 분으로, 허망한 명절에서 생수로,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시는 분으로, 어둠에서 광명을 주시는 분으로,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선한 목자로, 그를 보고 그리고 그를 믿었다. 이것은 그가 육체가 되셨으므로 우리가 보고 만나고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하나가 되지는 않았다.
한 알의 밀은 본 바요 들은 바가 되었으나 똑 같은 밀로 번식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핍박하는 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믿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어느 날이 오면 다들 달아나고 저주할 사람들이었다. 주님은 알고 계셨다. 이것이 믿음의 한계다.
개구리와 도룡뇽은 한 때, 한 연못에 아주 비슷한 모양의 알을 낳지만 자기들의 날이 오면 각각의 길로 갈라진다. 씨가 다른 것은 갈라진다. 건축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씨가 같은 것은 결국 함께 건축된다.
사역은 전환 되어야 했다. 보고 듣고 믿게 하는 사역에서 땅에 떨어져서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사는 사역으로 전환해야 했던 것이다. 주님은 씨를 뿌리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지면 번식한다. 말씀은 땅에 떨어져 육체가 되심으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장막이 되셨다. 이제 이 생명은 다시 땅(사람)에 떨어져 우리 안에서 30배, 60배, 100배로 번식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 베다니의 결심이 필요했던 것이다.
1~10장까지는 보고 듣고 믿어 누리기 위해 말씀이 육체가 되신 하나님 아들을, 11장부터는 생명의 번식을 위한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계시한다. 요한은 그 분기점에서 생명을 주려고 오신 선한 목자를 소개하고(10장) 이어서 주님이 베다니를 찾으신 마음을 알고 이 사건을 삽입시켜 두 사역을 연결시키고 있다.
우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그가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 여호와는 성막으로 백성을 만나셨고, 말씀은 육체(예수)로 모든 것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이제 육체는 죽으심으로 만민을 구속하여 자기 안에 포함하고, 부활하여 번식함으로 그의 나라를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신기한 일을 볼 것이고, 신기한 사람들이 될 것이며, 신기한 나라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