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2012년 6월 17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생명의 건축과 건축자(11)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11:45-12:11 -
성경 본문
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11: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11:53 이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11: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리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11: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11:56 저희가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11: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12: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12: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 하더라
12: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12: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함이러라
12: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2:11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생명의 건축과 건축자
생명의 번식(건축)을 위한 한 알의 밀(11:~21:)
2. 죽음의 길로 가심
b. 부활이요 생명으로
3)사랑의 기름부음을 받으심(요11:45~12:11)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유대공회에서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안하고 “누구든지 예수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고 공개 수배해 놓았고 증거인멸을 위해서 나사로까지도 없이하려고 모의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 나사로의 있는 곳에 이르렀고 거기서는 예수를 위하여 잔치가 열리게 되었다. 죽은 자가 살아났으니 당연히 잔치가 열린 것이다.
한편에서는 죽여 없이해서 자기들의 안전을 도모하자고 결정하고 칼을 갈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생명을 다시 얻은 기쁨으로 감사의 잔치를 벌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림을 받은 나사로와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잔치에 참예한 사람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음으로 향유 냄새가 온 집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이 일을 보고 “왜 이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 하였느냐?” 하고 못 마땅히 여겼다는 것이고, 예수께서는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셨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공관복음에도 거의 동일하게 기록 되었는데 다만 기록한 배경과 목적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누가는 단순하게 은혜의 보답과 사랑의 봉사로써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했고, 마태와 마가는 요한과 같이 거의 동일하게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것이라고 했으며, 나사로가 있는 곳을 문둥이 시몬의 집으로, 그리고 마리아를 한 여인으로, 나드향 한 근을 옥합에 든 것으로, 가롯 유다를 제자들로, 발에 부었다는 향을 머리에 부었다는 것으로 기록한 점이 요한과 조금 다른 점이라 할 수 있으나 사실은 동일하고 요한이 좀 더 구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마26;1~16,막14;1~,눅7;36~50참)
또 예수를 죽이려는 동기를 마태와 마가는 성전을 정화시키려는 것에 두고 있으나 요한은 나사로를 살림과 관계 된 것으로 말 하고 있다. 이는 요한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계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공회의 동기와 의도는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해서 저질은 악한 계략이었다.
예수에 대한 핍박이 극심해질 때 그에 대한 환영과 사랑도 극도에 달했다. 마리아가 한 여인으로서 옥합을 깨뜨려 그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 향유는 여인이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며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씼었다는 것은 극도의 사랑과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은 한 여인의 완전한 표현인 것이다.
이점이 죽음으로 가시는 주님의 마음과 부합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는 내 장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고는 있었지만 주님께서 죽음으로 가시는 길에는 서로가 입장이 달랐기 때문에 아무도 동행할 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 같이 주의 나라에서 한 아들은 주의 우편에, 또 한 아들은 좌편에 앉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오히려 알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이다(마16;22참). 그러니까 서로가 만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서로 동상이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여인이 주님의 죽으실 것을 알았다는 것은 무슨 특별한 계시를 받아서가 아니라 이미 그분에게 포함 된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발은 손의 사정을 알고 손은 발의 사정을 아는 것이다.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이듯이 몸은 둘이었으나 사람은 하나였던 것이다.
주님은 말씀이 육체가 되셨다. 말씀과 사람은 둘이었으나 몸은 하나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 더 이상 가까울 수 없지 않는가? 말씀은 육체로 표현 되고 실현 된다. 둘이 하나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영원한 갈망이며 목표인 것이다.
그런데 주님과 하나가 아니었던 가롯 유다는 이것을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았다고 못 마땅히 여겼다는 것이고 요한은 그를 돈을 맡은 자로서 돈이 욕심나서 한 말이라고 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어디든지 있다. 사실 귀한 돈을 왜 이런 곳에 허비하느냐는 것이다. (1데나리온이 1일 임금이라고 하면 그 액수는(80,000x300=24,000,000원)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러나 인간이 재물을 모으고 사용하는 것은 자신의 필요 때문인데 특별히 그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가치관에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재물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관심과 목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마리아가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은 유다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잘못 된 낭비임에 틀림없지만 마리아에게는 가장 소중한데 사용한 것이고, 예수께서 보실 때는 자신의 죽음을 향기롭게 하는 기름부음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을 기록한 요한은 가롯유다는 그 속에 마귀가 들어가서 스승도, 사랑의 낭비도, 기름부음도 모르고 오직 돈만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을 리는 없다. 오직 자신의 욕망을 위해 예수를 따르다가 그에게서 이 목적이 의심 되고 길이 막연해지자 그를 위험에 내 몰아서라도 좌우간에 분명한 답을 얻어 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고 스승이 죽음에 넘겨지게 되자 그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스스로 뉘우쳐 은 30을 다시 성전 금고에 던져버리고 자살하고 말았던 것이다.(마27;3~10참)
그러므로 그를 단순하게 양심도 없고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만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마귀가 그의 안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으로서 예수와 너무 다른 길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그의 가치관은 마리아와 너무 달랐고, 그의 길은 예수와 너무 맞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다른 제자들도 당시에는 그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스승을 넘겨 줄만큼 어리석고 무도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그는 홀로 “은 30량에 스승을 판 무도한 배신자”로 영원히 온 세상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은 30은 당시 노예 한명의 몸값이라고 한다.)
세상은 “이 복음”을 위해서 재물을 써주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목적을 위해 돈을 쓴다. 주님께서도 “가난한 자는 항상 너의 곁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당시에 가장 값있게 돈을 쓰려면 유다가 말 한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은 참으로 선한 일로써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지 꼭 필요한 일이며 언제나 할 수 있고 어디서나 환영 받을 일이다.
그러나 마리아와 같은 사랑의 낭비는 그 성질이 아주 다른 것이다. 선하냐 악하냐의 범주에 속한 것이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이 복음이 전하여지는 모든 곳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향기로운 제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인정받기 보다는 오히려 비난 받기가 쉬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복음이 전하여 지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14;9) 하셨다.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는 이런 향기로운 제사의 냄새가 필요하다. 예수의 복음은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의 어리석은 낭비로써만 전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