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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2년 9월 23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생명의 건축과 건축자(21)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13:36 -
성경 본문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생명의 건축과 건축자
알지 못하는 길-“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요13:36)
가룟 유다는 자기 계산이 있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고 싶었으나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를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었다.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또 받으러 가시는 길은 아담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길이다.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아담 역시 이 길을 알지 못해서 바벨로 갔기 때문에, 그 길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없다.
유다와 다른 제자들의 다른 점은 유다는 단지 자기 계산으로 그 길로 가시는 예수를 버렸고, 다른 제자들은 주를 따르겠다는 결심은 굳게 섰으나 그 길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영광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서로 사랑함으로 한 공동체 안에 있으라고 당부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일이 나타날 때까지 “내가 너희롤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사랑의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가룟 유다처럼 개인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인생은 늘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광야에 이끌려 왔던 이스라엘은 날마다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길이 어디입니까, 내일은 또 어디로 갑니까, 그리고 그 다음은 또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은 그나마 날마다 아는 길이 정해져 있었다. 먹고 일하고 자고 일어나고....그러므로 날마다 물어 볼 필요가 없었다. 아담의 길은 이렇게 정해져 있다. 창세기 5장에 있는 장수족들은 인생의 길이 어떠한지를 지도처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길을 알려면 그 사람들을 보면 안다.
그러니까 아담의 길은 인간의 방법으로 계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길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는 인간의 계산법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계산하여 예수를 넘겨 준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예측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실패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인간은 알지 못한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죽을 것이라고 상식적인 계산을 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서 이렇게 아직 살아 있다. 이 길은 누구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지금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올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찌하여 지금은 따를 수 없습니까? 목숨이라도 버리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는 주님을 따를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 길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따를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일, 즉 그리스도의 길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주님의 길은 아담의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다. 주님의 길은 계산과 의지적 결심만으로는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옥에도 함께, 죽는 데도 함께 하겠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을 알지 못해서 부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고 하셨다.
주인의 생각과 종의 생각도 같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창조자의 생각과 피조물의 생각이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아담에게 자신과 같은 마음이 되게 하려고 생명나무 열매를 주셨으나 아담이 이를 무시하고 지식으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되려는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지어진 인간에게 있어서 한 갈망일 수 있다. 제자들 역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어디에나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가 가시는 길을 알 수 없었고 그들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같을 수 없었기 때문에 끝내 따라가지 못하고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는 생명의 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의지에는 한계가 있다. 다람쥐가 아무리 몸이 가벼워도 새처럼 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기술의 문제도 아니고 의지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생명의 문제다. 그러므로 생명이 변화할 때 따라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3장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참조)
그러므로 유다처럼 생명 이전에 계략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다 예수를 만난다면 바로 따라가지는 못할 것이다. 너무나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창조자와 피조물은 너무나 다르다. 그런데 아담은 생명 아닌 지식을 통해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가 실패하였고, 유다는 자기 지식으로 계산하다가 스승을 팔아넘긴 사람이 된 것이다.
지식은 계략밖에 일으킬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는 갈망은 그의 형상으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 해도 지식으로 그 갈망을 이루려고 한다면 결국 계략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단은 언제나 자신의 지식과 계략으로 하나님을 앞지르려고 한다. 지식은 부리는 영인 천사들에게는 적합한 것이지만 어느 피조물이라 하더라도 그 지식으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면 계략이 되는 것이다.
지식과 계략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교리나 신학으로도 주님을 따를 수 없다. 교리와 신학을 배우면서 나는 주님을 따르고 있는 줄로 알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교리와 신학을 배우는 것과 주님을 따르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것은 교리나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막상 권위 앞에 서 보면 아담의 본성이 조금도 변화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확신도 생기고 자신감도 생긴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주님이 찾아오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주님은 자신의 몸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로 오신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의 거처에서 접견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몸 된 교회에게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