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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3년 2월 3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생명의 건축을 위한 기도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17:6-24 -
성경 본문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생명의 건축을 위한 기도
요17:1~·26
D. 믿는 이들이 하나로 건축되기를 원하심 요17:6~24
1.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지켜져야 함 (6~13)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습니다.’(11,12)
a.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아들들은 하나로 지켜짐
창조자 안에서 피조물이 하나이듯 아버지 안에서 아들들은 하나다. 주님은 피조물로서 창조자 안에서 하나인 인류를 아버지 안에서 하나인 인류가 되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메시야시다.
피조물은 기계적이다. 그러나 아들은 인격적이다. 예수님은 기계적인 운명 안에 있는 인류를 인격적인 사랑 안에 있는 인류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피조물의 운명 안에서 하나일 뿐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아들들로 하나가 된다. 피조물로서 하나인 것과 아들들로서 하나인 우리는 차원이 다르다. 피조물은 물질적이며 기계적이지만, 아들은 인격적이고 사랑이며 자유다.
1). 아버지의 이름(속성)은 사랑이시므로
창조가 능력이라면 낳음은 사랑이다. 예수님은 법과 능력의 하나님을 생명과 사랑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고 능력 앞에서 운명적이다. 그러나 생명 안에서 하나이고 사랑 안에서 자유다. 주님은 기계적이고 운명적인 나라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우리를 옮기셨다(골1:13).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1요4:16).
약육강식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자연 세계 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어렵다. 오히려 혼란스럽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 한다. 이 사랑은 아들이 받는 사랑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으므로 그 사랑을 안다. 예수께서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계시하셨다. 아들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름은 속성이다. 주님은 하나님의 속성을 아버지로 표현하셨다. 이사야는 그 때, 즉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황금시대에는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사52:6) 했고 예수께서는“내가 당신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17:6).” 하시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14:9)하셨다. 아들을 본 자는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을 본 것이다. 아들이 오시기 전에는 아무도 아버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1:14).
2).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하심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본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시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율법을 가지고 왔는데 그 율법 안에는 공의와 사랑이 섞여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우리에게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서 소위 말하는 인간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오로지 아버지를 보여주시려고 세상에 오신 아들이시다.
3). 공의와 율법은 불열을 이르킴
공의의 정당성은 율법이 보증한다. 그러므로 확고하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나타낼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앞에서 인류는 갈라진다. 이것도 율법이 증거한다. 그 안에서는 우열이 불가피하다. 도토리 키 재기가 일어난다. 그래서 서로가 싸우는 것이다. 하나 될 수가 없다. 연합이 없고 건축이 없다.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하나다. 율법의 행위에서 우열이 있어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심판의 차별이 있다 해도,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다. 제자들은 우리와 같이 율법 앞에서, 공의 앞에서 다 온전치 못했다. 똑바로 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 이름으로 저들을 지키시고 보존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그들 곁을 떠나면 누가 그들을 지켜줄 것인가? 공의와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어떻게 그들이 보존될 것인가? 유대인들은 곧 공의의 하나님을 내세워 율법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돌을 들어 칠 것이다.
유대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은 무서운 이름이었다. 야웨 (I H W H) 라는 이름은 신성한 이름으로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갈 때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라고 한다. “나는 ....이다”, 이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을 주는 이름인가 ? 그러나 반면에 또 얼마나 불안한 이름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 이름마저 왜곡시켜 무자비한 이름을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히브리어에는 원래 모음이 없기 때문에 모음을 여기저기 붙여서 읽는데 너무 거룩한 이름이기에 그냥 부르지 못하고 아도나이(adonai) 즉, “주님”이라는 말과 모음이 같다고 해서 통상 주님이라고 읽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야웨는 멀리 떨어져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얼굴 없는 왕과 같이 여겨졌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하시고 그 이유로 십자가에 처형되신 것이다.
4). 아버지 이름 안에 보존 됨
주님은 이런 얼굴 없는 왕을 내세우는 유대인들을 잘 아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들, 즉 아버지의 이름을 받은 자들을 지키시고 보존해 주시라고 기도하셨다. 아버지의 이름을 붙들고 기도하신 것이다.
b. 아버지라는 이름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 주신 이름임
아버지라는 이름은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주신 이름이다(요3:16). 이것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하나가 될 모든 인류를 얼굴 없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분열된 자리에서 구원하고 지키시려는 것이었다.
아들이 없는 세상에는 아버지가 나타날 수 없다. 그래서 공의와 율법의 하나님밖에 나타날 수 없었고 아버지의 사랑은 왜곡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얼굴이 없는 왕과 같기 때문에 분위기는 살벌하고 그 앞에 있는 인류는 각자가 아는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분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이름을 받은 자들이 먼저 지켜지고 보존되어하나로 지켜져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 같이 생명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11). 그래야공의와 율법만을 내세우는 무자비한 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 여기서 우리가 아들로 살아남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주님이 주신 아버지의 이름을 붙잡아야 한다. 어떤 사정과 경우에도 오로지 아버지의 이름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나도 살고 남도 살리며 분열된 모든 사람이 하나로 건축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