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2013년 3월 10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생명의 건축을 위한 죽음과 부활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18:1-11 -
성경 본문
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오는 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생명의 건축을 위한 죽음과 부활(요18:1~20:13,17)
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받으심 (18:1~11)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빗나갔다. 빗나간 것은 바로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가 구속되어야 하는 문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다. 아들은 이 뜻을 아시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받으셨다.
a. 모든 사람의 구속을 위해 잔을 받으심
예수를 잡으려고 온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하속들과 유월절을 위해 성전 수비대로 주둔한 로마 군대들이었는데 그 뒤에는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와 로마 총독 빌라도가 있었다. 이들은 종교와 정치로 이루어진 세상과 인간을 대표한다.
b. 유대종교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함
유대 종교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에서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동산으로 예수를 잡으러 왔다. 이 동산은 예수께서 가끔 기도하러 가시는 곳이었으므로 이를 안 가룟 유다가 그 길을 인도하였다. 유다는 스승을 팔고 넘겨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앞잡이가 되어 그를 붙잡기 쉽도록 안내했다.
c. 종교와 세상은 하나님 아들을 거부함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종교를 시작했고, 네피림의 후손들은 바벨을 건설하고 하늘에 오르자고 했다. 이 안에서 빗나간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람을 죽이려고 몰려온 것이다. 하나님의 동산에는 선악과가 있었고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아담은 이 경고를 무시하고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생명의 사람이 아닌 지식의 사람이 된 것이다.
d.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죽어야 끝이 남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그 지식으로써 생명으로만 가능한 모든 것을 모조했다. 하나님같이 되어 동산이 아닌 세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불순종의 인간은 무너진 바벨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지식으로 이것을 극복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지식에는 지식의 원리가 있고 생명에는 생명의 원리가 있다. 그러므로 지식으로 만든 것과 생명에서 나온 것은 같을 수가 없다. 지식을 바꾸어 생명이 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라지를 밀로 바꾸는 방법이 있다면 밭을 갈아엎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방법이 없기 때문에 밭을 갈아엎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모든 사람을 원위치로 구속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부인되고 죽임을 당해야 했다. 이 빗나감을 바꾸기 위해서는 죽음밖에 길이 없으므로 예수는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셨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죽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1). 예수는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자기를 내어주심
예수께서는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고 물으시고 그들이 “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했을 때 “내가 여기 있다”고 나서셨다. 그를 잡으러 온 사람들은 생명을 버리고 지식을 취한 온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2). 예수는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으심
오히려 베드로가 칼을 뽑아 잡으러 온 사람 중 한 사람의 귀를 치자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받지 않겠느냐” 하시고 검을 도로 꽂으라고 하셨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아시고 그 잔을 받으시려고 했던 것이다. 이 잔은 빗나간 인류를 죽음을 통해서 구속하는 것이었다. 구속은 죽음으로만 성취되어진다. 칼로 대항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3). 예수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김
아담은 예수가 싫어서 동산을 떠난 사람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이 사람 예수를 받아들일리가 없는 것이다. 역사 이래로 그리스도는 이런 아담에 의해서 무시되고 버림받았으며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예수와 아담의 만남은 그 역사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아담은 그 받은 지식으로 외형적으로는 바벨을 건설하여 하나님 나라를 대항하고, 안으로는 하나님같이 되어 생명을 대적한다. 그러나 영원한 나라는 하나님 나라밖에 없고 하나님 아들은 예수뿐이다. 아담은 지식의 능력으로 바벨을 건설하고 하나님같이 되었으나 아들은 생명의 순종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려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받으셨다.
그런데 능력으로 하나님같이 된 자들은 순종하는 생명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신 이를 핍박하고 죽이기로 결안한 것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 아들을 죽여 없앤다면 거짓 하나님 같은 자들은 저절로 죽은 자로 드러난다. 자기들이 자기들을 스스로 끝내게 되는 것이다. 가짜가 진짜를 없애면 가짜는 자동적으로 끝난다. 하나님의 지혜는 거짓을 끝내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은 이 뜻을 받들어 잔을 받으신 것이다.
어떻게든지 아담을 끝내야 한다.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 이미 죽은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스스로 죽었음을 나타내게 하셨다. 인류는 하나님 아들 예수를 죽임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임을 증거한 것이다. 죽은 자는 죽은 행실로써 스스로 죽은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4). 모든 사람이 예수를 배반함
스승을 배반한 가룟 사람 유다는 한 무리의 군인들과 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하인들을 데리고 횃불과 등불과 무기를 들고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왔다고 했다. 유다는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려고 온 것이다.
그는 예수의 제자였다. 그러나 예수의 행보에서 아담의 목적을 성취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스승을 세상에 넘겨주고 그 결말에서 자신의 길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다. 모두가 그렇다. 선악을 아는 지식의 성공을 기대하는 모든 사람은 다 유다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그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예수를 팔고 잡으러 온 사람들을 안내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5). 예수는 당연한 일로서 아버지의 잔을 받으심
그 자리에서 인류 중 어느 한 사람도 예수를 따를 사람은 없었다. 베드로가 칼로 대항하려 했던 것도 알고 보면 가롯 유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그가 아담의 목적 앞에 섰을 때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이다. 다른 것은 그는 예수를 인간적으로 사랑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 예수는 모든 사람(아담)으로부터 부인되고 버림받아야 했고 죽임을 당해야 했다. 아담은 예수가 죽을 때 비로소 자신의 죽음을 시인하고 끝이 난다. 그러므로 이것이 인류 구속을 위해서 정해진 길이었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었다. 인류를 구속하려면 흠 없는 한 사람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