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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3년 3월 24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생명의 건축을 위한 죽음과 부활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18:15-27 -
성경 본문
18: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8:16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18: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18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18: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18: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18: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18: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18: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18: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18: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18: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18: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생명의 건축을 위한 죽음과 부활(요18:1~20:13,17)
2. 예수께서 유월절 양으로 재판을 받으심
b. 제자들에게 심사 받으심
(요18:15~18,25~27마26:69,70,막14:66~68,눅22:55~57)
인류 구속을 위한 유월절 양으로서의 예수님은 종교로부터 심사 받으셨을 뿐 아니라 삼 년이나 따르던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도 심사를 받으셨다. 종교가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제자들 역시 그 본성으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이 부정적으로 예수를 대한 사람들이라면, 다른 한편은 긍정적으로 대한 사람들이었다. 유대 종교의 공회원들은 메시야가 옴으로써 지금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세상이 뒤집히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제자들은 기득권이 없는 사람들로서 예수님에게서 메시야의 위력을 기대했던 사람들이다. 결국 인류를 구속할 어린양은 이들 모두에게 심사를 받고 버림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1).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함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주를 부인할지라도 나는 결코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사람이고, 옥에도 함께 하고 죽는 데도 함께 하겠다고 했었으며, 예수께서 잡히시던 동산에서 대제사장의 하속의 한사람의 귀를 치고 주님을 보호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에게 각별한 제자였다. 변화산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했고,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17:5)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고 사형이 언도된 예수를 보면서는 나는 이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이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사람은 그 때 그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a). 마지막까지 지켜봄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정결하게 먹기 위해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결국을 지켜보기 위해서 제사장을 아는 다른 제자(요한?)의 안내를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마지막까지 따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 의리, 그리고 주님에 대한 사랑은 한계에 부딪혔다. 아담이 기대하는 최소한도의 기대마저 거둘 수 없는 자리에서 진실로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던 사람,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도 살려내던 사람,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부스러기를 열두 광주리나 거두게 했던 사람, 변화산에서 본 그 영광스러운 사람은 어디로 가고, 지금 저 사람은 또 누구인가? 그는 진실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는 단순히 두려워서 의리를 배신한 비겁한 배신자가 아닌 것이다.
그는 분명히 “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 데도 같이 가겠다”했고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예수는 가야바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의 대답은 허공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베드로는 그가 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메시야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 저 사람인가? 과연 저 사람이 “사람의 아들이 전능한 자의 영광의 우편에 앉을 것”이라는 말은 왜 하고 있는 것인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b). 완전하게 부인함
세 번 부인했다는 것은 완전하게 부인했다는 것이며, 닭이 울기 전이란 로마군들이 세 번째 보초를 마치는 시간이므로 세 번 부인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했다는 것은 절대로 모른 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아무튼 베드로는 도저히 예수를 안다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슬피 울었다고 한다. 이것은 배신에 대한 회개의 울음이 아니라 주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해서 그를 부인해야 하는 한 사람의 슬픔이었다.
2).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아들을 버림
공회원들은 종교성의 악한 면을, 제자들은 그 선한 면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에서는 자기들의 하나님에 대한 권위와 그의 율법을 수호한다는 충성심(?)에서 무슨 방법으로든지 참람한 자를 제거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끝까지 따르려고 목숨을 걸고 모든 힘을 다했지만 부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로서 악으로든지, 선으로든지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함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드러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본성으로서는 하나님 아들을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편이 악하고 어느 편이 선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없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고 의리가 있다. 거기다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정상적으로 가동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 수 없고 구속을 위한 어린양으로서의 하나님 아들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요 지도자인 모세까지도 이것을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하여 광야까지 인도한 위대한 선지자요 하나님의 종이었다.
유월절을 제정하고 구속하는 어린양을 드리도록 모든 절차를 계시받아 가르쳤으나 주 예수 안에서 전 인류가 구속되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성정이 같으시면서도 죄는 없는 분이다(히4:15).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를 알 수 없다는 것을 베드로가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체험하고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믿지 않고서는 받을 수가 없다.“내 생각과 너희 생각은 다르다”(사55:8)고 하셨다. 그 다른 생각이 인간에게 임할 때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일반으로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선과 악에 대한 지식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이다.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은 다른 분이 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인간과 다른 생각을 하시는 하나님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인간들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우연이라고 하거나 귀신들의 세계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알지 못하는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통한 인류 구속은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생각이기 때문에 선지자로 예언되었지만 그 선지자들 자신도 다는 알지 못했던 일이 아닌가?
피조물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런즉 피조물인 인간이 어찌 지으신 이의 마음을 다 알 수 있으리요?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계시하신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있어서 우리는 그분을 다는 알지 못해도 점차적으로 알아가는 것이다.(고전13:12,고후13:12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