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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3년 4월 21일
주제: 생명의 복음
제목:생명의 건축을 위한 죽음과 부활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요19:30, 눅23:46 -
성경 본문
19: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19: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말씀 요약
요한복음 - 생명의 복음
생명의 건축을 위한 죽음과 부활(요18:1~20:13,17)
2. 예수께서 유월절 양으로 재판을 받으심
c). 다 이루시고 운명하심 (요19:30. 눅 23:46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하셨던 주님은 왜 “다 이루었습니다‘ 하고 운명하셨을까? 시편 22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과 탄원을 하다가 어떻게 그 하나님을 찬양을 할 수 있었을까?
사람이 살다 보면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고, 찬양할 때가 있게 마련이다. 이스라엘은 이 역사를 반복했던 대표적인 백성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그렇다. 그런데 그들은 형편에 따라서 원망도 하고 찬양도 하기 때문에 원망도 찬양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나 시인은 무슨 형편이 달라져서 원망이 찬양으로 전환되었던 것인가? 아니다, 시인은 말이 없으니 알 수 없지만 예수님 앞에 다가오는 것은 좋은 형편이 아니라 죽음뿐이었던 것이다. 그 때 온 땅에는 어둠이 와서 제9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했다. 이는 극도의 절망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런 극적인 전환이 왔단 말인가? 분명히 무슨 답을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어서 부르짖은 그 최후의 절규가 어떻게 완전하게 바뀔 수 있었겠는가? 그 고통이 육체적이든 영적이든(하나님과 분리됨) 이유 없이 전환이 왔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답을 누가가 전해 주었다고 본다.
마태와 마가는 주님의 마지막 말씀과 영마저 포기하고 운명하심에서 시편 22편 전반부의 의인의 절규를 들었고, 누가는 영을 아버지 손에 내어 놓는 아들에게서 시편 22편에서의 창조적 전환의 비밀을 본 것이다.
손은 권능, 즉 전권을 상징하고, 영은 생명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은 내놓아도 영은 내놓지 않을 수 있다. 동물들의 생명의 내용은 혼이다. 그러니까 죽으면 끝이다. 그런데 사람은 육체와 함께 혼이 죽어도 영은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남아 있는 영을 가지고 사후세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가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예수를, 마태는 메시야로서의 왕, 예수를 전해 준다면, 누가는 대속에 적합한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전해 준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구속이 인간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것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가 전한 복음에서 구속을 위해 그 영마저 아버지의 전권 앞에 내어놓는 제물로서의 한 사람을 본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종을 보내셨고 메시야를 보내셨으나 그들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인류를 구속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구속은 영까지 아버지 앞에 내 놓는한 인간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다.
시험지는 출제자 앞에 제출해야 합격이 가능하고, 인생은 아버지 손에 내놓아야 창조적 전환이 가능한 것이다.
영을 아버지 앞에 내놓아야 하는 것은 영을 붙잡고 있는 사단에게서 온 인류를 다 구속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 영까지 다 구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주님이 영을 아버지 손에 내 놓으심으로써 구속의 범위가 확정되었음을 아시고 아버지께“다 이루었습니다.”라고 하시고 운명하신 온 인류의 구속자를 본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빙자할 수는 없지만 인생이 막힐 때, 어쩔 수 없이 왜? 라는 절규를 하게 될 그 때, 생각은 물론 영까지 아버지 손에 내어 놓고 주님의 대답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을 내놓았을 때 주님은 일하실 수 있다. 그러나 언제 그 인간의 생각이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이 생명의 내용으로서의 영을 내놓기를 원하신다. 인간은 자기를 다 내놓았을 때 주님의 손을 경험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내놓고 부활의 하나님을 경험했고, 야곱도, 모세도, 다윗도 다 그러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죽어도 영은 아버지 손에 내놓지 않고 자기 영을 가지고 죽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은 내 것이 아니다. 영의 아버지가 계신다(히12:9). 내가 붙들고 있으면 사단이 사용하고, 아버지의 손에 있으면 아버지께서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은 아버지 손에 내놓아야 한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주님은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옮겨 주옵소서“라고 하였으나 나중에는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셨던 것이다. 생각을 내려 놓으셨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게에서는 그의 영을 아버지 손에 내 놓으셨다. 이는 생각뿐 아니라 영까지도 구속하기 위한 것이다.
누가는 이 자리에서 아버지 손 앞에 영을 내놓으신 주님을 보았고, 요한은 “다 이루었습니다”하시고 운명하신 주님을 본 것이다. 그 사이에 아버지께서는 “너는 구속을 위해 죽는 어린양이다” 하셨고, 아들은 그 말을 듣고 ”다 이루었습니다“ 하셨다고 할 수 있다. 예수는 단지 구속을 위한 어린양으로서 죽임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편 22편에서는전환의 이유는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회 중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인간에게는 가진 것이란 없는 것이다. 포기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것이다. 혼은 내 것일 수 있어도 영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단지 영의 아버지 앞에 생명의 근본이요 내용이며 모든 것의 모든 것인 영을 제출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 창조적 전환의 세계에서 그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는 바울을 수행했던 제자였다. 바울은 탄원에서 찬송으로의 전환을 경험한 사람이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겪으면서 "내가 약할 때 곧 강하여짐이라"(고후12:9) 했고, 날마다 죽음에 넘겨지면서 새 생명을 경험했던 사람이다(고전15:31참). 그러므로 그를 따랐던 누가는 영을 아버지 손에 내놓는 아들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바울복음의 중심은 주와 함께 죽었으므로 주와 함께 사는 것이다(롬 6장 참조). 마가와 마태는 종이요 의인으로서의 예수의 절규를 들었다면, 누가는 온 인류를 대속하기에 합당하도록 영을 아버지 손에 내어놓는 온전한 제물로서 한 인간을 보았고, 요한은 구속을 완성하기 위하여 어린양으로서 죽임 당하신 아들 예수를 본 것이다. 그는 섬기심에 있어서 종으로서 의인이시고, 구속에 있어서 제물로서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우리 구속의 표적이며 완성자시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참 표적이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1:22,23)
구속자는 친족 중에 가장 가까운 자여야 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우신 분으로서 자신의 영을 아버지 손에 내놓으심으로서 우리를 위한 온전한 대속의 제물이 되셨다(민27:11,룻3:12참). 이것은 우리를 영까지 구속하여 온전하게 거듭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다 이루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