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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5년7월31일
제목: 5.자비의 아버지, 위로의 하나님
설교자: 김치현 목사
본문: 고후1:3-6 -
성경 본문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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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3. 자비의 아버지, 위로의 하나님
(고후1:3-6)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세 번째, 은혜 없이 삶이 온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다.
가. 자비의 아버지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 관한 말씀을 하기 전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창3:1).” 하신 말씀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넘치는 자비의 말씀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어쩔 수 없었겠구나.”는 말씀이다. 인간에 대한 자비로운 이해, 따뜻한 이해가 사람으로 하여금 소생할 기회를 얻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비유로 농부가 밀을 심었는데 가라지가 나왔을 때, 땅을 정죄하지 않고 “원수가 그랬구나.” 하고 말씀하셨다. 땅은 농부에게 절대적인 필요이기 때문에 가라지가 났다고 땅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적 필요 안에서 창조되었기에 사람을 버릴 수가 없으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탄이라는 존재를 말하는 것은 인간 문제의 모든 근원을 사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잘못을 인간에게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또 요한복음에는 죄를 어두움의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부딪히고 넘어지고 하는 일은 빛이 비취면 사라질 일들이다. 어두움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고 빛이 비취면 사라질 일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셨다. 몰라서 그랬고 속아서 그랬다고 말하시는 것은 어찌하든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말씀이다.
사탄, 어두움, 무지함...... 이렇게 말씀함은 사람을 정죄하는 말씀이 아니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문제를 다른 데서 찾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경우 마귀의 자식, 어두움의 자식이라며 사람을 정죄하려 드는 것은 사탄이 만든 선악의 대립 구도에 휘말리는 것이 되어버린다.
나. 모든 위로의 하나님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나와 너’가 동일시될 때 가능한 말씀이다. “사랑은 타자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헤겔) 나와 너의 동일시가 오직 사랑 안에서만 완전하게 존재한다고 하였다.
어떤 곤궁에 처한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같은 마음을 가질 때 위로가 발생한다. 잘했을 때는 남다르고 싶어 하지만, 곤궁에 처했을 때 “나도 너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빌2:1-2)"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 우리의 환난이 클수록 위로도 커지고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지경이 넓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위로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힘이기 때문이며 그 자체가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다. 아브라함과 롯과 헤어지면서 롯은 눈에 보이는 좋은 땅을 차지했지만, 아브라함은 척박한 산지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위로를 차지하게 되었다(창13:7-18 참조).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1:3)이시다.
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라고 불렀던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지만 최종적으로는 아들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는 하나님이 최종적인 하나님이며, 예수 안에서 나를 아는 것이 인생에 대한 가장 복된 이해이다.
사람은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사회 속에서 온기를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 고독하게 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안다', '이해한다'는 말이 영어로 undrerstand이다. 이해받는 것은 나와 같은 자리에 있어 주는 것이고 나보다 밑으로 내려와 주는 것이다.
"내 법을 저희 생각 속에 두겠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마음을 체질로 알게하겠다는 말씀이다. 어떻게 우리에게 하나님을 이해시키겠는가? 먼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해하신 것이다. 그래서 낮고 천한 자리에까지 내려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어 옥에 있는 영들에게까지 찾아가신 것이다. 그래서 먼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 졌다"(고후5:11)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아셨다.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보이는 것이다. 타락한 이래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나무 뒤에 숨고 노력의 결과와 성취 뒤에 숨어 그 사람 자신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제물로써, 제물의 죽음을 보임으로써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보이게 하셨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제물을 통해서 타락한 인간을 만나셨지만 이제는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보신다.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을 받으셨기에 예수 안에서 내가 발견되기만 하면 바로 구원인 것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