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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5년8월1일
제목: 3. 예수께서 사탄의 계략을 훼파하고 인격을 되찾아 생명 안으로 인도함
설교자: 이현래 목사
본문: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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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3. 예수께서 사탄의 계략을 훼파하고 인격을 되찾아 생명 안으로 인도함
여호와께서는 구원의 마지막 경륜을 완성하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셨는데 그는 두 가지 일을 이루셨다. 첫째는 구속을 통하여 마귀에게 유린되었던 인격을 회복하셨으며, 둘째는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새 생명을 가져오셨다.
가. 인격을 되찾아 완전케 하심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오셨다고 하셨다 (마1:21). 사람의 죄는 지음 받은 목적에서 이탈하여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과의 관계를 위해서 정해주신 위치를 지키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생명공급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 독립하여 하나님 같이 되려고 사탄이 제시한 선악을 아는 지식의 나무 열매를 택한 것이다. 존재의 위치인 인격을 이탈하고 생명의 양식을 바꾼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생명관계와 그 공급은 끊어지고 사탄의 양식과 본성을 받아 그의 종이 된 것이다. 사탄의 본성은 지식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는 것이다. 인간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인간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가 없고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육체로 인하여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죽은 후에, 즉 육체가 없어진 후에야 가능하다는 모순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육체가 없는 천국이 어디에 있으며 해탈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속이는 자에게 속은 것이다.
속이는 자 사탄은 어디서 왔는가? 사람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이 창조되기 전부터 있었던 존재다. 사람 이전부터 있었던 자이기 때문에 사람은 모른다. 하나님이 창조한 땅을 바다로 덮었던 자이고(창1:2), 사람을 유린하여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한 자다(창3장 참). 여호와의 목적과 계획을 방해하는 자다. 사람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따르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어 목적과 계획을 세우라고 하는 자다.
그러나 지금 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무도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냥 살기 위해서 가는 것뿐이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목적이 없다.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신하기 위한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목적과 계획이 없으면 인생은 갈 곳이 없어서 방황하게 된다. 선장이 없는 배와 같이 된다.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는 어디 있는가?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으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증거는 분명하다(겔28장 참조). 하나님의 행하시는 곳에 언제나 나타나 방해를 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사탄은 영임으로 보이지 않지만 증거로 나타난다.
사람은 자기보다 먼저 있는 자에게 속아서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가 모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머리가 없고 생명이 없다. 생존자일 뿐이다. 자기 위치, 즉 격을 잃은 것이다. 우주 안에서 자기 위치를 잃으면 유리하는 자가 된다(창4:12참),
예수께서 오신 것은 이 위치를 회복하여 하나님은 물론 만물과의 관계까지 온전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많은 성현들이 가르치고 깨우쳤으나 왜 그대로인가? 위치를 잃었기 때문이다. 개에게 소의 삶을 가르치고 깨우친다고 소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가르치고 깨우쳐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방법보다 위치회복이 선결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사신 삶을 본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본받지는 못했다. 누구나 본받을 삶이 아니다. 먼저 제자들이 실패하지 않았던가! 위치가 다르면 본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를 본받고자 했던 사람들은 그를 버렸고, 믿고자 했던 사람들은 그를 죽였다. 위치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전능한 신을 모독하는 자요 인간을 조롱하는 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선악을 아는 인간으로서는 본받을 것도 없고 믿을 것도 없는 한 사람이 모든 인간의 저주를 받은 채 나무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인류에게 실망을 주고 저주 받은 한 인간이 전시 되었던 것이다.
아담은 이 사람을 보고 여호와의 말씀을 버리고 사탄의 말을 들었으며 생명과를 버리고 선악과를 먹었던 것이다. 사람의 위치를 버리고 하나님 위치를 취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의 경륜은 잠시 멈춰야 했고 새로운 길을 다시 열어야 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예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제자들은 그를 보고 하나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 이때 예수는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되고 싶은 전형이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었다. 아담이 바라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던가! 인간이 이럴 수 있다면 무엇이 부러워서 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먹었겠는가?
그러나 예수께서 나무에 달렸을 때 나타난 그는 인생이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아담은 이 사람을 보고 자신의 위치를 바꾸려한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지식)으로 자신의 인격을 만들려고 한다. 숨고 변명하며 훈련하면서......
예수께서는 인생의 위치에서 그 진실을 보여 주셨다. 진실은 이러했다. 무엇을 더해도 본질은 인생이라는 것이다. 선악을 아는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하고 모든 능력을 다 행해도 사람은 원래 그대로 사람일 뿐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아무도, 무슨 방법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바다를 잔잔하게 할 때 그의 인격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인격이 나타나지 않았음으로 그때 아무도 그 분 안에서 구속을 받지 못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인생(인격)의 원위치가 나타났다. 이 위치에서 만민의 구속(위치회복)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구속이 되신 것이다(고전1:30,엡1:7,골1:14,롬3:24).
그는 우리의 구속자요 우리의 원형이시다. 이 진실로 인하여 사탄은 거짓말하는 자로 폭로되고 그를 믿은 인생은 속은 자로 들어난 것이다. 거짓이 심판을 받고 진실이 나타나니 평화가 온 것이다(2:14참). 온 우주가 다 고요해졌다.
예수께서는 죽으심을 통하여 생명의 길을 예비하셨다.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거짓이냐, 진실이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시인하면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고 생명나무 열매가 공급되는 하나님의 동산으로 인도된다.
나. 부활로 새 생명을 가져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진실을 증거하고 죽은 것이다. 자신의 진실하심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증거하고, 거짓말로 사람을 속인 자를 폭로하여 심판하고 인격을 본래의 위치로 회복시켰다.
사람이 자기 위치로 돌아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생명나무 열매가 공급된다. 새 생명이 공급되고 새 생명 안에서 행하게 된다(롬6:4참).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새 생명으로 살리셨다. 진실하고 의로운 자를 살리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한 약속을 이루셨다. 부활은 생명을 위한 창조자의 약속이다. 만물은 이 약속 안에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부활은 하나님께로 가는 생명의 필수 과정이다(요12:24,시16:10참). 아담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새 생명으로 부활했어야 했다.
옛 생명이 끝난 예수에게 하나님은 새 생명을 주시고 새 생명의 주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는 만민을 예수의 죽음 안에 포함하여 죽게 하고 그의 다시 사심 안에 포함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의 진실을 시인하는 모든 사람은 진실이신 예수 안에 포함 되어 구속 되고, 새 생명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부활이신 예수 안에 표함 되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된다(롬6장참).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위치(인격)를 자신의 위치로 인정하면 이미 그 안에 포함 된 것이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성현들은 다 사람을 가르치거나 깨우치려고 했던 것이다.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을 끝내시고, 또 한 사람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을 의롭다 하시고, 또 한 사람 예수 안에서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것이다.
나무에 달린 예수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르칠 것도 없고 줄 것도 없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혹은 조롱하고, 혹은 실망하고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참 사람, 즉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모양대로 만든 인간으로 인정하고 새 생명을 주신 것이다.
아담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통하여 많은 것을 덧입고 있다. 이런 사람을 가르치면 더 많은 것을 덧입게 될 것이고 깨우치면 더 깊이 자아에 빠질 것이다. 자기들끼리 우열이 생기고 낙오자가 생기며 투쟁이 일어난다.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그러면 한 사람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여럿이 아니고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지었고 세상에는 한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다.
개는 여럿이지만 한 개뿐이고 소는 여럿이지만 한 소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소가 귀가 둘이면 모든 소가 다 귀가 둘이고, 한 소가 귀가 하나이면 모든 소가 다 귀가 하나인 것이다.
하나님의 계산은 신기하다. 하나님, 사람을 창조하신 자만 이런 계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계산의 개념에 따라서 한 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 것이다. 배우고 깨우치는 세계에는 선생 따로, 제자 따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안에는 구원자와 구원 받은 자가 다 하나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죽으셨음으로 구속의 주님이시다. 그런데 그를 통하여 구속을 받은 우리 또한 그분과 한 자리에서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는 구속하신 자와 구속을 받은 자가 하나인 것이다(히2:11참).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 포함되었듯이 이제 모든 사람은 예수 안에 포함되었다. 아담이 사람의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예수가 사람의 기준이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다 예수 안에서 정해졌다. 죽어도 예수 안에서 죽은 자로 판명되고 살아도 예수 안에서 인정된다. 아담은 거짓이었다.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 했으나 아담은 자신의 업적을 내 세워 죽은 자가 아닌 체하고 산 것이다. 나무 뒤에 숨은 것이다(창3:8참).
하지만 예수 안에서는 모든 진실이 판명되었다. 어떤 업적으로도 죽음을 숨길 수는 없다. 죽음 앞에서는 더 이상 나무 뒤에 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신이라 할 수 있는 업적이 있었지만 십자가에서 죽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지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업적으로 죽음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속된 인격에 하나님이 새 생명을 주시는 것뿐이다. 마치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었듯이 하나님이 살려야 한다. 사람들이 볼 때 예수는 나무에 달려 죽어있었다. 죽은 자였다. 그의 측근들이 다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격 안에 생명을 불어넣으신 것이다.
부활이다! 새 생명이다! 예수와 함께 죽은 자들, 구속 받은 자들에게도 새 생명을 주신다. 새 생명은 이런 인격을 찾고 있다. 씨를 가진 농부가 흙을 찾듯이 이런 사람을 찾는 것이다. 부활은 배우고 깨닫는 것이 아니다. 새 창조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을 찾아가셨다.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셨고(요20:22,), 떡과 생선을 준비해 놓으시고 먹으라 하셨다(21:13참).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 흙에 뿌리는 씨가 되셨고, 인격에 불어넣는 성령이 되셨으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양식이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