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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15년8월1일
제목: 7.예수 그리스도 : 우리의 원형
설교자: 김치현 목사
본문: 빌1:20-21, 3:7-14 -
성경 본문
빌 1장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3장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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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4. 예수 그리스도 : 우리의 원형
(빌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3:7-14) “푯대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네 번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원형이고 우리의 소망이자 목표(푯대)이다.
예수 안에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그가 우리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의도하신 말씀은 알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고백하였다(골1:15).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시고 모든 사람의 원형이시다.
또한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 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 잘 보여줄 수 없기에 우리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더 나아가 예수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이다(요20:2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451년 칼케톤 회의)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바로 만날 수 없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따라가다가 보니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분의 출생과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따라가다가 보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예수만의 성취가 아니라 우리도 함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하리라(계3:21)."
그러나 예수의 출생, 공생애, 죽음, 부활, 승천, 보좌에 앉으심, 재림 등 예수의 일생은 우리가 범접하기 힘든 신화적인 틀 속에 담겨져 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나를 포함한 얘기인지 알자면 껍질을 벗기고 속을 들여다봐야 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전 과정을 따라가는 것이다.
가. 동정녀 탄생
우선 동정녀 탄생의 구약의 예언으로 인용된 이사야서 말씀의 전후 맥락은 유다 왕국이 북 왕국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동맹에 포위된 상황이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주께서 친히 한 징조를 주실 것인데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는 말씀을 하게 된 것이다(사7:1-14).
성서의 역사는 하나님이 절망적 인간사에 개입하신 사건이며, 구제불능의 상황, 가장 비천한 자리에 뻗쳐진 하나님의 손길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이를 낳는다면 그 시대에 이보다 더 비천한 일은 없다(눅1:48). 남자를 모르는 여자가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의 아들이 나오는 것은 처녀가 아이를 낳는 일처럼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일은 언제나 처녀가 아이를 낳는 것처럼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사건이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사건이라는 것은 인간의 절망적 상황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총체적인 표현이다.
나. 기적을 행하심
예수의 모든 이적은 그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표적이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사탄과 그의 졸개들(귀신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는 인간과 자연을 사탄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사탄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예수는 말씀으로써 이런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음을 선포했고, 이 선포를 행동으로 입증해 보이기 위해 이적을 행하셨다는 것이 복음서의 관점이다(마4:23,눅10:9,11:20).
한편, 바울은 이적 대신 언제나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이적 중 최대의 이적은 죽으심과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라고 말한다(고전1:24).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며(롬3:21),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것이며(롬5:5,8, 갈2:20), 율법의 사슬에서 해방시키신 것이고(골2:14-15), 사탄의 권세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사건이었다(골1:13).
다. 죽으심
세상에 놀라운 삶을 살다가 감동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도 많다. 어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기림이 되고 교훈을 얻고 아름답게 추모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기보다 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죽음이다. 예수의 죽음의 독특성은 그 죽음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 안에서 만나는 예수의 모습은 참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는 명백한 그림이다. 예수의 죽음은 생의 마감이 아니라 살아서 하신 모든 말씀과 삶의 집약으로서의 죽음이다. 그의 삶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의 죽음에서 나의 죽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한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위대한 성인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원래의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라. 부활
예수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다. 베드로는 열린 무덤을 보았고, 도마는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찔린 흔적을 보았다. 제자들은 함께 생선을 구워 먹고 부활하신 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들은 역사상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고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의 부활을 경험할 수 없다. 예수의 부활을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형태로 전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다.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말씀했다(고전15:3-8).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부활을 본 것은 아니지만 부활의 영원한 실재를 보았다. 바울의 증거 안에서 예수의 부활 사건은 온 인류가 참여할 수 있는 사건이 되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해 길게 말하면서 최종적으로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말씀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말씀했다. 부활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상황, 그리고 마지막 멸망 받을 원수인 사망으로부터의 승리이다.
마. 승천
예수께서는 승천을 “아버지께로 돌아감”으로 말씀했으며(요8:14, 요20:17), 제자들은 승천을 “높이 올리워져 영광스럽게 된 사건”으로 이해했다(행2:33, 빌2:9-10).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민9:17,출16:10,24:16,시14:3, 사19:1)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첫째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영광스럽게 되심으로 구속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둘째 승천을 통해 인류가 예수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계3:21). 마지막으로 승천은 성령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태어나게 하는 경륜적 사건이었다.
바. 재림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미래의 한 날을 정해놓고 하늘만 보고 있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은 우리가 모든 일에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엡4:15).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 얼굴과 얼굴을 보는 것처럼 그를 알고 함께하는 것이 재림을 맞이하는 삶이다. 사도 요한의 고백처럼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요일3:2).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스런 신부가 준비될 때 신랑으로 오시며, 그의 백성이 준비되었을 때 그의 왕국과 함께 오신다. 그 날에는 모든 눈물이 그 눈에서 그치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사라지게 된다.